천주교성지순례/부산교구

<국내성지076> 한국판 카타콤바, 죽림굴 신앙사적지 190215

노인장대 2019. 3. 10. 07:45

죽림굴(대재 공소)은 기해박해(1839년)를 피해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해 온  교우들과 간월의 교우들이 좀 더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한  박해 시대(1840~1868년)의 공소로 언양 지방의 첫 공소인 간월 공소에 이은 두 번째 공소이다.

 

이 공소는 샤스탕 정 신부와 다블뤼 안 신부가 1840년부터 1860년까지 사목을 담당했던 곳이며, 경신박해(1860년) 때는 박해를 피해 들어온 최양업 신부가 3개월 동안 은신했던 곳이기도 하다.

최 신부는 이 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집전하며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 외에도 울산 장대에서 처형된 세 분의 복자 허인백, 이양등, 김종륜이 한때 이곳에서 머물렀으며, 김 아가타도 최 신부를 도우며 이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이후 계속되는 경신박해와 병인박해(1866년)의 여파로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100여 명을 넘던 신자들이 사방 각지로 흩어져 대재 공소는 폐쇄되었다.

 

그 후 1986년 11월 9일 언양 성당 신부와 신자들이 죽림굴을 발견하고, 현재는 해마다 발견 기념일에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데 이 굴은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

 

(한국천주교성지순례/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이제 5박 6일에 걸친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13 곳의 성지 순례를 마치고 마지막 하나 남은 죽림굴로 간다.

사실 죽림굴은 살티 공소 순례의 다음코스에 해당한다.

언양에서 밀양으로 연결된 24번국도를 타고 석남사를 지나면 살티 공소와 유적지가 있고, 고개 하나 넘으면 배내마을이고 거기서 왼쪽 산길로 올라가면 죽림굴이다.

 

 

 

하지만 배내마을 죽림굴 입구에서 죽림굴 까지는 3.4km의 가파르고 차량의 통행이 안되는 도보의 산길이어서 보통의 남자가 왕복에 세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 네 사람이 다 노약자이고 환자들인데 왕복에 네 시간은 걸려야 할 것이므로, 우리는 아예 하루 일정을 잡아 서울로 돌아가는 날 여기에 올인 하기로 했던 것이다.

 

 

 

죽림굴로 오르는 입구쪽 안전한 곳에 차를 세워두고 시멘트 포장된 임도를 따라 죽림굴로 올라간다.

 

 

도로는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어서 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거의 45도 각도의 오르막 길을 수없이 돌고 돌아도 끝이 없다.

 

 

두 시간 동안을 수 없이 쉬어가며 구비구비 돌아 올라가니 그제서야 처음으로 고개 마루가 나오고 이정표가 보인다.

 

 

 

죽림골 방향 표시 이정표를 따라가니 거리표시 이정표가 나온다.

 

 

 

지금까지 죽을 고생을 해서 두 시간을 왔는데 기껏해서 2km를 왔고, 앞으로 1.4km를 더 가야한다니 주저앉고 싶은 마음 뿐이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는다고 누가 데려다 주는 것도 아니고 죽으나 사나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이 때 꼭 필요한 기도, '주님! 저희에게 힘을 주소서.' 가장 잘 들어주시는 기도다.

드디어 죽림굴에 도착했다.

 

 

 

죽림굴 표지석 바위위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위로는 바로 하늘에 닿아있고

 

 

저 아래로는 신불산 자연휴양림의 끝없는 숲의 바다가 아득하다.

저렇게도 멀고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오직 주님을 향한 신심 하나로 모든 어려움을 참아냈을 옛 선조들이 경이롭다.

지금처럼 잘 닦여진 길도 없었고 온갖 산짐승들이 우글 됬을텐데....

 

 

죽림굴은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간월산(1,069m) 정상 가까이에 있는 천연 석굴이다.

이 석굴은 주변이 대나무로 덮여 있어서 "죽림굴"이라 불렸는데, 입구가 낮고 대나무로 덮여있어서 포졸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안으로 들어가면 굴안이 넓어 100여명이 함께 지낼수 있어서 박해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로마시대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던 지하 묘지)였다.

 

 

 

 

돌계단을 따라 굴입구로 올라간다.

지금은 대나무는 보이지 않았지만 입구가 작고 낮아서 나뭇잎이 무성한 때면 굴이 보이지 않게 생겼다.

 

 

 

 

 

 

굴의 입구 안쪽에 십자가와 성모상이 놓여있었고, 성지 순례 확인 스템프도 여기에 비치되어 있다.

 

 

 

 

성모상이 놓여 있는 바위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굴 속이 어두워 한참을 서 있으니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떻게 여기까지 운반해 왔는지  제대로 사용했을 돌판 위에 십자고상, 양초, 묵주, 필기도구 등 신앙 생활 용품들이 놓여 있다.

박해 시대에 여기 은신했던 선조들이 사용했던 용품들도 있는 것 같고, 근래에도 여기에서 기도를 드렸음직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안쪽은 상상했던것 보다는 훨씬 넓은 공간이 있긴 했지만 천정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있고, 바닥은 울퉁불퉁 돌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안에서 공동생활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김 아가타 같이 장독으로 병든 몸을 이끌고 최양업 신부님이 만드신 목기를 저 아래 까마득히 먼 마을에 가져가 팔기도 하고, 그 마져도 안되면 먹을 것을 구걸을 해 오면서 최양업 신부님을 돕다가 석달만에 선종하였다니 참으로 그들 모두의 고통과 어려움이 어떻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긴 여정의 순례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간다는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지만

죽림굴 사적지에서 받은 충격과 감동이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서울산에서부터 집까지 가는 5시간의 힘든 운전도 친구 이재현 요셉과 둘이 번갈아 가면서 힘든 줄 모르고 할 수 있었다.

 

 

 

관할 성당 : 언양 성당 / 052)262-5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