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105> 다산 정약용 유배지, 다산초당 190321
강진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무려 18년간 유배됐던 곳이다.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의 형제는 약현, 약전, 약종이 있는데 이들 4형제는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첫째 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며,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고 또한 이들 4형제의 누이가 이승훈의 부인이다.
순교한 셋째 약종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데 이어 복자가 되었으며, 이미 성인이 된 정하상과 정정혜가 그 자녀다.
다산은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만천유고]에는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담겨 있다.
(한국천주교성지순례/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수련원길 33에 위치한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북쪽으로 약 800m 떨어져 있는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다산이 좋아해서 가까이 했다는 동백꽃이 마침 때를 맞아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다산초당 300m 전방 산길 입구에 작은 주차장이 마련되 있고 정다산 유적지 안내판과 약도가 세워져 있다.
여기다 차를 세우고 수백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엉켜있는 '뿌리의 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뿌리의 길을 다 올라가면 왼쪽에 작은 집 서암(西庵)이 있다.
서암은 다산이 18년의 유배 기간에 길러낸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다산 정약용이 18년의 유배생활 중 10년간을 기거하며 수많은 명저를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 했으며 18인의 제자를 길러낸 다산초당이다.
이 초당은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무러진 초옥을 복건하였고 그해 정다산 유적으로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유명하다.
왼편으로 올라가면 언덕에 다산초당의 제1경으로 불리는 정석(丁石)이 있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초당 뒷쪽 왼편에 다산초당 제2경으로 불리는 약천(藥泉)이 있다.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않는 이 샘은 처음에는 물이 촉촉이 젖어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초당의 앞마당에 있는 다산초당 제3경이라 불리는 다조이다.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이 돌은 차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던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의 물을 퍼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
다산초당 오른쪽에 있는 다산초당 제4경으로 불리는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다.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오른쪽 천일각으로 가는 길에 있는 동암(東庵)이다.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을 지닌 천일각(天一閣)이다.
다산 유배시절에는 없던 것을 1975년에 강진군에서 세웠다.
정자에 올라 강진만을 바라보며,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다산의 유배시절을 상상해 본다.
비록 배교로 인해 영광의 이름을 얻진 못했지만, 인고의 세월동안 남긴 업적이 후세에 준 영향은 성인의 길 못지 않다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