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109> 최양업신부 중심사목지, 배티성지 190407
배티 성지는 한국 천주교 박해기에 형성된 배티 교우촌에서 시작되었다.
이 교우촌은 1837년 5월 성 모방 베드로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이를 전후하여 배티 골짜기 이곳저곳에는 비밀 신앙 공동체들이 형성되었다.
박해 소설 [은화]의 무대가 된 삼박골을 비롯하여 동골, 절골, 정삼이골, 지장골, 발래기 등이다.
1850년에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1857년 주교 수품)가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설립하고, 배티 교우촌에 신학교 건물로 사용할 집 한 채를 마련하였다.
그 뒤를 이어 1853년 여름부터 신학교 지도를 맡게 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배티 교우촌을 본당으로 삼고 전국 다섯 개 도를 순방하였다.
현재 배티 성지에는 2014년에 문을 연 '최양업 신부 박물관'이 있다.
배티 인근에는 유명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2017년 4월, 진천읍 사석리에서 배티 성지 관내로 이장된 복자 오반지 바오로 묘소를 비롯하여 삼박골 모녀 순교자 묘, 새울 교우촌과 백곡 공소의 순교자 묘소 등등.
또 배티의 '6인 묘'와 '14인 묘'에는 이름 없는 들꽃처럼 살다가 순교한 신앙 선조들의 줄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천주교성지순례/한국천주교주교회의)
충청북도 진천에서 경기도 안성으로 가는 313번 국도를 따라 가다 백곡을 지나 약 4km정도 가면 왼쪽에 예쁜 성당과 배티성지임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을 만난다.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처럼 각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최양업 신부 기념 대성당이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선종 150주년을 기념하여 2011년 4월 15일에 착공하여 2012년 4월 15일 봉헌하였다.
대성당 왼쪽 벽에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부제 시절 홍콩에서 여든 두 분의 기해.병오박해 순교자전 라틴어 번역을 끝마치면서 바친 기도문을 동판 부조해 놓았다.
대성당 내부의 모습이다.
제대와 감실과 십자고상과 함께 최양업 신부의 초상화도 모셔져 있다.
이곳에 모셔진 성모 마리아상은 매괴 성당의 성모 마리아상을 그대로 모셨다.
한국 전쟁 때 인민군이 쏘았다는 7발의 총알 자국이 선명하다.
오른쪽 언덕으로 오르면 돌에 조각된 순교현양비가 있다.
그 오른쪽 다리 건너에 최양업 신부 박물관이 있다.
배티 성지 문화재 지정 기념 사업으로 건설하여 2014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에서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와 함께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와 사목 활동, 유물등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에서 313번 국도 건너편에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하고 지도하던 성당이자 신학교가 있다.
방 두 칸짜리 초옥인 이 집은 1850년에 프랑스인 다블뤼 신부가 세운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이자 성당이고 사제관이었다.
1853년 여름부터 최양업 신부가 맡아 신학생을 지도하고 여기를 거점으로하여 전국 5개도를 걸어다니며 사목하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유(劉) 데레사의 묘
왼쪽부터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수원교구 수리산 성지 참조), 최양업 토마스 신부, 최 신부의 어머니 복자 이성례 마리아(서울대교구 당고개 순교성지 참조)의 흉상이다.
걸어가는 모습의 최양업 신부의 동상을 지나 왼쪽에 야외 제대와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103위 성인을 상징하는 103개의 나무 계단과 돌비석으로 되어 있다.
순교현양비에서 위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쉼터가 있고 왼쪽에 최양업 신부 기념 성당인 소성당이 있다.
최양업 신부 기념 성당은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아래 윗층 모두 성당이다.
윗층을 윗성당이라고 부르고 아래층을 소성당이라고 부르는데 오늘은 윗성당에서 11시에 미사가 있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순례자가 많은데다 서울의 모 성당에서 예비신자들이 단체 성지순례를 와서 윗성당이 꽉 찬다.
신부님이 강론 시간에 성지순례를 오게된 사유를 물어봤고, 전국 111곳 순례중 세 곳을 남겨 놓고 있는 우리의 사연을 들으시고 전 참석자에게 축하박수를 유도하신다.
성당 오른편에 전국 5개 도 100여개의 공소를 걸어다니며 사목하셨던 최양업 신부님의 동상과 일생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일년에 5,000리에서 7,000리를 걸어다니며 사목을 했고, 심할 때는 한달에 겨우 나흘 밖에 못잤다고 한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님을 "땀의 순교자"라고 부른다. 순교는 안했지만 땀으로 순교에 버금가는 일을 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 앞에서 십자가의 길 제1처가 시작된다.
여기의 십자가는 특이하게도 커다란 둥근 멧돌에 청동으로 조각을 했다. 순교자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의 육중한 무게를 보여주는 듯하다.
마침 단체 순례객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시작하고 있어 함께 합류하여 기도를 바친다.
십자가의 길 제 14처가 끝나는 곳에 산상 야외 성당이 마련되어 있다.
자연석 그대로의 제대와 함께 나무 밑동을 그대로 잘라 만든 야외 의자가 있고 산기슭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야외 성당 오른쪽에는 양업 영성관이라는 이름의 피정의 집이 있다.
양업 영성관은 지상 2층 규모로 3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데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피정이 가능하다.
산 위로 2km 올라가면 6인 무명 순교자 묘가 있다는 표지판이 있다.
2km 라는 거리 표시는 보지 않고 금방 묘가 있을줄 알고 산을 올랐다.
마침 피어난 진달래를 구경하며 30분을 올라도 묘가 나오지 않는다.
미사 시간에 늦을 것같아 할 수 없이 내려와 표지판을 다시보니 2km가 적혀있다.
산길 30분이면 500m정도 갔을까? 1/4 정도 가서 되돌아 온 것 같다.
이 산길을 따라 6인 순교자 묘와 무명 순교자 14인 묘까지 도달하는데 약 2시간 가량 걸린다고 한다.
아니면 성지 입구로 다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약 1km정도 올라가면 무명 순교자 묘역에 닿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성지 내부의 순례를 마무리 짓고 성당을 떠나면서 자동차로 14인 무명 순교자 묘역에 도달했다.
자동차길 왼쪽에는 복자 오반지 바오로의 묘가 있고, 그 뒤로 500m 산길을 오르면 6인 무명 순교자의 묘가 있다.
2011년 3월 4일 "조선교구 신학교지"와 "무명 순교자 14인 묘소" 그리고 "삼박골 모녀 순교자 묘역" 등 3개소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 150호로 지정되었는데
이 중에서 "삼박골 모녀 순교자 묘역"은 성지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어서 찾아보지 못하고 성지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참고로 소설 "은화(隱花)"는 삼박골을 중심으로 한 배티 지역을 무대로 박해시대의 천주교 박해상황을 고발한 소설이다.
저자 윤의병 신부가 오랜 기간에 걸쳐 신문에 연재하다 마무리짓지 못한 것을 한국교화사연구소가 두 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2차 방문
일자 : 2019년 10월 20일 일요일, 맑음
분당 성루카성당 전신자(733명) 단체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