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이야기/서울특별시

왕실 정원, 창덕궁 후원과 정자들 200111

노인장대 2020. 1. 12. 07:49

창덕궁이 아름다운 궁궐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후원 덕분이다.

창덕궁 후원은 10만 평에 이르는 산자락의 골짜기를 그대로 정원으로 삼고 계곡 곳곳에 건물과 정자를 지어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정원을 경영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 나아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 정원의 미학이다.

 

 

 

창덕궁 후원은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하던 당시에 조성되어 창덕궁과 창경궁의 공동 후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불타버리고, 1623년 인조 때부터 역대 왕들에 의하여 개수.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루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인공적인 정원을 삽입시켜, 최소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서 자연을 더 크게 완성시킨 절묘한 솜씨를 자랑한다.

 

 

4개의 골짜기에 각각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정원이 펼쳐진다. 4개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결국은 큰 자연인 뒷산 매봉으로 연결된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인데 비해, 창덕궁 후원은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 정원이었다. 또한 여러 복합적인 기능을 수용한 장소이기도 했다.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사색에 잠기던 곳이었고 때로 연회를 열고 활쏘기 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왕이 참관한 가운데 군사훈련도 행해졌고, 왕과 왕비가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기도 했다.

 

 

창덕궁 후원 관람은 제한이 되어 있다. 하루 최대 14회, 1회 100명을 사전 예약을 받아 후원 입구에서 해설사와 관리인의 인솔하에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 평소에는 관람에 불편이 없으나 꽃 피는 봄이나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 피크에는 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후원의 관람 코스는 낙선재 옆 후원 입구에서 시작하여 부용정, 애련정, 존덕정, 옥류천, 연경당을 두루 관람하고 규장각 위쪽 산길로 해서 출구로 돌아나가는 한시간 반 정도의 즐거운 산책이 된다. 창덕궁 후원의 관람 동선은 길의 아름다움과 길을 걷는 즐거움까지 고려한 결과물이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지 않고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후원을 한바퀴 돌아 출구로 나갈 때쯤이면 자연미와 인간미를 동시에 느끼도록 되어있다.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

 

후원의 첫 번째 중심지로서, 휴식 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과 서향각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였고, 영화당에서는 때로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개인적 휴식을 위한 부용정은 연못에 앞발을 담그고, 행사를 위한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들도 각각 특색이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을 이룬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섬에는 잘생긴 소나무가 넓게 자리잡고 있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부용정, 사정기비각, 규장각, 영화당이 자리하고 있다. 화려한 부용정은 두 다리를 물속에 담근 자세이고, 사정기비각은 멀찍이 산자락에 바짝 붙어 있다. 주합루 누각은 언덕 위에 높이 올라앉아 이 공간의 주인이 된듯하고, 영화당은 후원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대청마루 집으로 환하게 열려 있다.

 

 

어수문과 주합루

주합루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2층의 누각건물이다. 아래 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을, 위층에는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정책 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 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는 작은 어수문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현재는 출입금지되어 올라갈 수는 없다.

 

주합루

 

 

어수문

 

 

취병

조선시대 독특한 조경 기법의 하나로 푸른 병풍처럼 만든 울타리이다. 내부가 보이는 것을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그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부용정과 사정기비각

 

 

부용정

부용지를 처음 만든 이는 세조이고, 임진왜란 후 이를 매만진 이는 숙종이지만 오늘날의 모습으로 경영한 이는 정조였다. 부용지는 동서 35미터, 남북 30미터에 이르는 장방형 연못으로 사방에 화강암 장대석을  쌓아 마감했으며 연못 가운데에는 작고 동그란 섬 하나가 떠 있다. 이렇게 못이 네모지고, 가운데 둥근 섬 하나를 둔 것은 천원지방의 동양적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정조가 섬에 아름다운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부용정이라 했다. 부용은 연꽃으로, 연꽃처럼 아름답고 못에 연꽃이 많다는 뜻이다.

 

 

정조는 신하들과 함께 부용지에 배를 띄우고 배 안에서 시를 지었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 시를 짓지 못하는 신하는 연못 가운데 섬에 안치시키기로 했다. 몇 사람이 과연 섬 가운데로 귀양을 갔는데 곧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는 다산 정약용의 '부용정 시연기'에 나오는 이야기라 한다.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과 우물

세조는 4개의 우물을 팠는데 그 물맛이 너무 좋아 보석 같고, 유리 같고, 옥 같다며 친히 마니정, 파려정, 유리정, 옥정이라 이름 지었고, 훗날 숙종이 이를 기념하여 사정기비를 세웠다. 비각 속에 이 비가 있으나 오늘날 우물은 2개 밖에 찾지 못했다 한다.

 

 

영화당(暎花堂)

 

영화당에서는 여러 임금들이 많은 행사를 열었다. 과거를 보기도 하고, 종친이나 신하들을 불러 술을 내리고 활쏘기를 하고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영화당 방 안에는 인조, 선조, 효종, 현종, 숙종대왕의 어필이 걸려 있고, 영화당이라는 현판은 영조대왕의 글씨라 한다.

 

 

주합루도 부용정도 출입이 금지되어있지만 영화당에는 올라가서 앉아 쉴 수 있도록 10분의 시간을 준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부용지의 모습은 더욱 아름답다.

 

 

10분의 휴식시간을 쪼개어 주변의 풍경을 담아본다. 영화당 정면의 담 너머에는 창경궁의 춘당지가 있는데 옛날에는 부용지와 춘당지 사이에 춘당대를 두어 거기에서 활쏘기 대회를 하고 군사훈련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담장으로 가려져 춘당지가 보이지 않고 무심한 단풍잎만 붉게 타오른다.

 

 

 

애련지(愛蓮池)와 의두합(倚斗閤)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1809~1830)는 총명하고 인품이 높아 18세에 순조를 대리하여 정치를 지휘하다 22세로 요절한 왕자였다. 이곳에는 숙종 대에 건립한 애련정이 있었고, 효명세자는 1827년부터 여러 시설물을 세워 새로운 정원을 만들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치를 구상했다. 그가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던  의두합은 단청을 하지 않아 단촐하고 소박하며, 또한 독서와 사색을 위하여 궁궐 내 유일한 북향 건물로 되어 있다. 단칸의 애련정 역시 작지만 애련지 연못에 반쯤 걸친 모습은 경쾌하며 정자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절경을 이룬다.

 

 

불로문

 

 

애련지

 

 

애련정

 

 

의두합

 

 

주합루로 올라가는 길

 

 

연경당 앞 연못

 

 

창덕궁 뽕나무 (천연기념물 제 471호)

 

이 뽕나무는 애련지에서 관람지로 가는 길 관람지 입구 창경궁과의 경계 담장에 있다. 높이 12m, 가슴높이 줄기둘레 228cm이고 나이는 약 400년이 되었다. 옛날에는 농사와 함께 누에치기가 중요한 국가 기간산업이었다. 이에 백성들에게 뽕나무 가꾸기를 장려하고 궁궐 안 곳곳에 뽕나무를 심어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 시범을 보이는 '친잠례'를 거행하였다. 이 나무는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뽕나무 중 가장 크고 나이가 많다.

 

 

존덕정(尊德 정)과 폄우사

 

이 부근은 후원 안에서 가장 늦게 지금의 모습을 갖춘 곳이며, 연지는 원래 두 네모꼴과 둥근 한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졌다가 일제강점기에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다. 연못 주변에 육갑 겹지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 길쭉한 맞배지붕을 가진 폄우사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관람정 맞은 편 언덕에는 단칸의 사모지붕을 가진 승재정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1644년 건립된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관람정과 승재정은 1830년대 이후에 세워졌다.

 

 

 

관람정(觀纜亭)

관람정은 부채꼴 모양에 대단히 공예적이고 장식적인 정자이다. 관람정의 '람(纜)은 닻줄이라는 뜻이다. 즉 '연못에서 뱃놀이하며 구경하는 정자'라는 의미이다. 파초 잎에 글씨를 써놓은 듯한 현판은 관람정의 장식미를 한껏 높인다.

 

 

존덕정(尊德亭)

존덕정은 관람지의 중심이 되는 정자이고 아름답고 당당하고 기품있는 정자이기 때문에 인조 때 세워진 이래로 숙종, 영조, 정조, 순종까지 많은 임금이 존덕정에 와서 시와 문장을 남겼다.

 

 

萬川明月主人翁自序(만천명월주인옹자서)

존덕정 안 북쪽 벽에 '萬川明月主人翁自序' 라는 제목으로 빽빽하게 쓴 현판이 있는데 정조가 집권 말기인 1798년에 직접 지은 글이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니,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하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 라는 강력한 내용이다. 평생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 듯하다.

 

 

폄우사

'폄우'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친다'는 뜻이다. 이곳에 쉬면서도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뜻을 담아 붙인 이름인 듯하다.

 

 

승재정(勝在亭)

언덕 위에 있는 승재정은 '빼어난 경치가 있다'는 뜻인 만큼 여기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과연 일품이다.

 

 

존덕정을 뒤로하고 후원의 가장 깊숙한 골짜기인 옥류천으로 가자면 이번엔 북쪽 산자락을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편안한 흙길이고 길지는 않지만 30도에 가까운 경사면을 오르자면 숨이 가빠지는데, 고갯마루에 닿으면 가쁜 숨을 고르고 쉬어가라고 또 하나의 정자가 나온다.

 

 

취규정(聚奎亭)

취규란 '별들이 규성으로 모여든다'는 뜻인데 규성은 28수 별자리 중 문운을 주관하는 별이다. 즉 '인재가 모여든다'는 뜻으로 이 정자에 들어가 쉬면 모두 인재가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정자를 보았다. 부용정, 애련정, 존덕정, 관람정, 폄우사, 승재정, 취규정, 후원에서만 지금까지 7개의 정자를 보았고, 옥류천에 가면 5개, 성정각에 1개, 도합 13개의 정자를 보게 된다. 개방되지 않아 보지못하는 정자까지 하면 훨씬 더 많다. 후원에 있는 정자들은 형태도 다르고 스케일도 다르고 자리앉음새도 다르다.

우리나라 정원에서 정자가 갖는 의미는 크다. 정자는 정원의 얼굴이고, 필수적이며, 정자가 있음으로 해서 정원이 완성된다.

 

 

옥류천(玉流川) 일원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옥류천이라 한다. 1636년,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어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였고 작은 폭포로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때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 태극정, 농산정, 취한정 등 간략한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매우 은밀한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은 볏집으로 지붕을 덮은 궁궐 내의 유일한 초가집이다.

 

 

취한정(翠寒亭)

언덕 위의 정자 취규정에서 오른쪽 가파른 오솔길로 내려가면 거기가 옥류천이고 계곡의 초입에서 관람객을 반기는 것이 취한정이다. 취는 푸르다는 뜻이고 한은 차갑다는 뜻이니, 푸른 숲에 둘러싸여 시원하다는 뜻이다. 취한정은 그 규모나 모습이 취규정과 닮았는데, 홑처마 팔작지붕이고 가운데 칸이 양쪽 칸보다 현저하게 넓으며 사면이 벽체나 창호 없이 트인 점이 흡사하다.

 

 

소요정(消遙亭)

소요정은 옥류천의 중심 정자로서 여기에서 옥류천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다. 앞을 보면 소요암의 병풍바위와 유상곡수를 타고 내린 폭포가 한눈에 들어오고, 뒤를 보면 돌다리 넘어 골 아래로 냇물이 장하게 흘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옥류천의 유상곡수는 천하의 명작이다. 암반 위로 흐르는 물줄기를 원형으로 한 바퀴 돌려 홈을 파서 경주 포석정과 마찬가지로 술잔을 띄우면 돌아가게 했다.

 

 

태극정(太極亭)

소요정의 더 안쪽에 태극정이라는 정자가 정원의 중심을 잡고 있다.

 

 

청의정(淸의亭)

태극정 곁에는 청의정이라는 초가 정자가 있다. 곁에는 논이 있어 지금도 논농사를 시범으로 짓고 있다. 창덕궁 관리소에서 여기서 벼를 재배하여 추수한 쌀로 떡을 빚어 관람객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고 한다. 

 

 

'청의'는 '맑은 잔물결'이라는 뜻이다. 정자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면 서까래들이 정연히 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겉으로는 소박해 보이지만 디테일이 정교하여 더욱 매력적이다.

 

 

농산정(籠山亭)

태극정 아래로 돌아내려가는 길에 있는 농산정이다. 정조, 순조, 효명세자가 자주 이용하면서 시문을 남겼을 뿐 아니라 같이 온 신하들에게 글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옥류천으로 내려왔던 길을 되돌아 언덕으로 올라와서 취규정 앞에서 오른쪽으로 연경당 가는 뒷길로 들어서면 단풍나무 숲길이 울창하다.

 

 

연경당(演慶堂)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에게 진작례를 올리기 위해 1828년에 연경당을 건립했는데, 원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진작례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서 효명세자는 이를 왕권 강화책으로 이용했다. 현재의 연경당은 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립했다. 사대부 살림집의 제도를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서재인 선향재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다.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의 농수정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연경당은 창덕궁의 또 하나의 자랑이다. 헌종이 사대부의 사랑채를 본떠 세운 낙선재가 선비집 사랑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에 더해 양반가의 저택으로 지은 연경당이 있음으로써 창덕궁은 완벽한 전통 한옥 종합전시장이 되었다.

 

연경당의 출입 정문인 장락문과 행랑채

 

 

연경당은 전형적인 상류층 주택의 구조를 갖고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어 있고, 서재인 선향재, 정자인 농수정, 그리고 찬간이라고도 불리는 반빗간이 독립 건물로 떨어져 있다. 밖에서 보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담장이 있어 분리된 듯하지만 내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우리 양반 가옥의 특징 그대로다.

 

 

사랑채

 

 

선향재(서재)

 

 

안채

 

 

농수정(정자)

 

 

 

연경당 밖의 연못과 애련정과 의두합

 

 

나가는 길, 왼쪽 막혀 있는 길은 규장각으로 가는 길이다.

 

 

돈화문으로 나가는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금호문 못미쳐 궐내각사 건물이 있는 곳에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된 향나무 한 그루와 만나게 된다. 1404년 태종이 창덕궁 창건을 시작할 때 어느 정도 자란 것을 심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수령이 700년 가까이 된다. 동서남북으로 가지가 뻗어나갔는데 대부분 잘려나가고 죽었는데 동쪽 가지만은 온갖 풍상 속에서도 용틀임을 하며 꿋꿋이 살아남아 주인 잃은 창덕궁을 홀로 지키고 있다.

 

 

 

 

참고 자료 : 1.창덕궁 내 안내 표지판,  2.유홍준 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