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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지

<국내성지173> 겟세마니 피정의 집(신앙의 증인 조선희 필립보 신부) 220519 강원 인제군 소양강 변에 위치한 겟세마니 피정의 집은, 1991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소속 선교사 조선희 필립보(Philip J. Crosbie) 신부가 설립하였다. 조선희 신부는 1915년 호주에서 태어나 1939년 수품 후, 1940년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58년 동안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해방 전 이미 일제에 의하여 강제 구금과 추방을 경험했던 조 신부는, 홍천 본당 주임 신부로 재직하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교우들과 성당을 지키다가 공산군에게 피랍되었다. '죽음의 행진'과 3년간의 포로 생활을 통해 수많은 순교자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조 신부는, 주님의 은총으로 생환하여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변함없이 선교사로 신앙을 전하며 일생을 온전히.. 더보기
<국내성지171> 하늘아래 첫공소, 구룡 공소 211229 현재 용성 성당 관할의 구룡 공소는 청도군 운문면, 영천시 북안면, 경산시 용성면의 경계에 위치한 구룡산(675m) 정상 가까이에 있는 공소로,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릴 정도로 첩첩산중에 위치하고 있다. 살티의 김영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간월에서 체포되어 풀려난 뒤 이곳 자인골 용성면 매남 3리(큰골)로 와서 3년간 살다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다시 언양의 안살티로 가서 살았다. 로베르 신부의 1887년 사목 보고서에 따르면, 이 공소에 60명의 신자가 있었다. 1921년에는 대구교구장인 드망즈 주교가 로마 성모 대성당을 주보로 정한 뒤, 준본당으로 축성하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한국 전쟁 동안 신자들은 피난을 가지 않고 공소를 지켰는데, 1952년 10월 이영조 가밀로 회장을 중심으로 공소 예절을 거행.. 더보기
<국내성지169> 평화의 안식처, 성직자 묘지 211228 1915년에 조성된 성직자 묘지는 대구대교구청 내에 자리하며, '남산 100년 향수 길'인 성모당, 성 유스티노 신학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과 이어져 있다. 이곳에는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를 비롯한 7명의 주교, 6명의 몬시뇰, 63명의 사제, 그리고 2명의 차부제가 잠들어 있다. 묘지 입구에는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는 "그의 운명을 돌이켜 보며 네 운명도 같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다."(집회 38,22)에서 따온 라틴 말이다. 묘지를 들어서면 큰 화강암 십자가가 보이는데, 그 아래에는 "그때 하늘에서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마태 24,30)라고 적혀 있다. 이는 공심.. 더보기
<국내성지168> 성 유스티노 신학교 211228 대구대교구의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를 설립하고자 했지만 재정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그런데 중국 상하이의 어떤 신자가 거액을 희사하면서 '유스티노 성인'을 주보로 모실 것을 요청하여,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1945년 3월 19일 문을 닫기까지 모두 67명의 사제가 배출되어 삼남 지방의 신자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한 사목 활동을 하였다. 이후 40여 년이 지난 1982년 '선목 신학대학'으로 재개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3호)은 프와넬 신부가 설계하였고,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맡았으며, 책임자는 프랑스 영사관을 건축할 때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ㄷ자형 평면.. 더보기
<국내성지165>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생가) 211231 경북 군위의 산골에 위치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생가는 그가 군위 초등학교를 거쳐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김 추기경의 집안은 충남 논산군 연산의 양반 가문으로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기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순교자의 집안이다. 조부인 김 요안은 병인박해 때 연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옥중 순교하였고, 조모 강말손은 남편의 순교 뒤 어린 자녀들과 함께 갖은 고생에도 교우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김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은 경상도 사목을 담당했던 로베르 신부의 일을 돕기도 하였고, 모친인 서중하는 대구의 유명한 신자 집안인 달성 서씨의 후손이었다. 로베르 신부의 중매로 김영석 요셉과 서중하 마르티나는 혼인을 하였고, 1922년 4월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 더보기
<국내성지164> 계산 주교좌성당의 전신, 새방골 성당 211227 새방골은 경신박해(1860년)를 전후하여 신자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병인박해가 끝난 뒤 더 큰 교우촌으로 되었다. 경상도 순회 선교사였던 로베르 신부는 1888년 말 대구의 선교를 위해 신나무골에서 대구와 가까운 새방골로 거처를 옮겼다. 로베르 신부가 이곳에 은신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건 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옆집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뀐 덕분에 저의 숙소와 성당이 있는 건물을 구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것을 '신기하다고, 하늘이 이 집을 보호하신 것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 며칠 뒤 사람들이 우리 종교를 배우고 싶어한다고 찾아왔습니다. 저의 집의 일부는 불에 탓지만.. 더보기
<국내성지163> 대구대교구 두 번째 본당, 가실 성당 211227 1895년에 설립된 가실 성당(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48호)은 대구 계산 성당에 이어 경상도 지방에서는 두 번째 성당이며, 경상도 북부 지역과 충청도 일부 지역까지 교세를 맡아 관할하는 어머니 교회의 역할을 하였다. 성당의 주보성인은 성모님의 어머니 안나 성녀이다. 현재의 성당과 사제관은 1923년에 완성되었고, 설계는 파리 외방 전교회 프와넬 신부가 하였다. 가실 성당의 건축 양식은 신로마네스크 양식이며, 당시 본당 신부였던 투르뇌 신부가 망치로 벽돌을 한 장씩 두드려 가며 확인하였다고 한다. 6.25 때 남한과 북한의 양측 군인들이 성당을 병원으로 사용하였으며,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는데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52년부터 북한 덕원에서 내려온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맡아 사목을 하고 있다... 더보기
<국내성지162> 대구대교구 세 번째 본당, 김천 황금 성당 211227 [사학징의]에 따르면 1801년 박춘산이 '천주학'을 믿은 죄로 김산 읍(김천의 옛 이름)에 유배되었으며, 같은 시기 부산 동래 출신인 현계탁도 형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숨겼다는 이유로 김산 고을 증산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여러 박해 시기를 거치면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 신자들이 김천 지역의 산골 마을로 숨어들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해서 마잠, 먹방이, 장자터 등 여러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김천 지역은 이러한 박해를 피해 들어온 신자들의 교우촌일 뿐만 아니라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김천 성당(현 김천 황금 본당)은 대구 성당(현 계산 주교좌 성당)과 가실 성당에 이어 대구대교구의 세 번째 본당으로 1901년에 설립된 뒤 경상도 북부 지역의 전교와 신앙의 중심지였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