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언양 나들목에서 12km 남짓한 거리에 있는 살티는 언양 성당, 시외버스 터미널, 석남사를 지나 1km 쯤 더 간 곳에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경상남도 밀양군.울주군의 경계 지점에 있는 가지산(1,241m)의 중턱에 위치한 살티는
원래 예로부터 전쟁을 위한 화살을 만들었던 곳이라 해서 시현(矢峴)으로도 불리었다.
살티 공소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를 거치면서 간월, 죽림굴로 숨어들었던 신자들이
경상도 지역에 본격적으로 행해진 경신박해(1860년)와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다가 모여든 곳이 안살티(현재 청수골 주변)이다.
'살티'라는 말의 유래는 당시 포졸들이 신자들을 찾아 석남사까지 왔다가 경주로 빠져 나감으로써 이곳의 신자들이 죽음을 면하고 무사히 살아남아
'살 수 있는 터'라고 하여 살티 혹은 살틔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살티 공소 인근의 간월골에는 을해박해, 기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큰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신자수도 늘고 공소 건물도 신축되었다.
하지만 경신박해, 병인박해의 여파로 공소는 불타버렸고 교우촌은 폐허가 되었다.
이때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간월골의 몇몇 교우들은 깊은 산속으로 피해야 했고 새로운 은신처로서 나무가 울창하고 맹수들이 득실대던 이곳 살티로 숨어들었다.
김영제와 김 아가타 묘
이곳에는 이 지역에 복음이 전래된 초기부터 활동했던 김교희의 손자 김영제 베드로(1827~1876년)와 그의 여동생 김 아가타의 묘가 있다.
살티 순교 성지는 1981년 11월 언양 성당 신자들이 정성을 모아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1994년 4월 2일 부산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현재의 위치로 유해를 이장하고,
울산 본당 신자들의 후원금을 모아 분묘를 재단장하고 순교비를 건립하는 동시에 십자가, 제대, 예수 성심상, 성모상, 성지 표지석 등을 세웠다.
김영제는 아버지 김상은과 함께 경신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병인박해 중에 대재 공소에서 다시 체포되었는데 마침 국가의 경사로 특사 방면되어 9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 후 그는 피신한 가족들을 수소문하여 살티마을로 내려왔으나 장독이 악화되어 1876년 죽음에 이르렀다.
한편 동생 동정녀 김 아가타도 경신박해 때 자진하여 체포되었다가 포졸들이 자신을 다른 곳으로 팔아넘기려는 것을 알고 도망쳐
최양업 신부가 있는 죽림굴에서 은신하며 지내다가 잡혀갔던 후유증으로 1860년 최 신부의 임종경을 들으며 선종하였다.
김교희의 천주교 후손 가족 묘지
십자가의 길
관할 성당 : 언양 성당 T : 052)262-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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