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의 통치이념인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이 분리된다고 믿었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은 조상의 혼백을 모시기 위해 집을 지었는데, 무덤(墓)을 만들어 백을 모시고 사당(廟)을 지어 혼을 모셨다.
왕가에서의 왕족의 삶의 공간이 궁궐이고, 왕족의 무덤이 왕릉이며, 왕실의 사당이 종묘이다.
또한 왕실은 일반대중에게 위엄과 모범을 보여야 함으로 궁궐도 왕릉도 종묘도 규모의 크기와 함께 격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고 오례(吉禮.嘉禮.凶禮.軍禮.賓禮)를 이 기준에 따랐다.
따라서 왕릉을 조성할 때도 철저히 국조오례의를 준수했으며, 단지 지형에따라 위치나 모양이 변형되는 경우는 있었다.
동구릉에 있는 아홉개 능원에는 능침의 수와 지형에따라 능원의 형태가 달라지는 곳이 몇군데 있다.
조선왕릉의 근본이 되는 태조의 건원릉이 단릉이고, 선조의 목릉이 동원이강릉이라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이고,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안에 합장한 합장릉(수릉)과 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원릉), 그리고 한 언덕에 왕과 두 명의 왕후 봉분 세 기를 나란히 배치한 삼연릉(경릉)의 세가지 유형의 왕릉을 답사해 보기로 한다.
오늘은 어린이 관람객들이 아침 일찍 왕릉에 구경을 왔다. 이 아이들도 장차 왕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금천교를 지나 수능의 경내로 들어간다.
수능(綏陵) - 추존 문조(文祖)와 신정황후의 능
문조(익종1809-1830)는 제23대 순조의 아들로 효명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기 위해 노력했으나 22세에 요절하였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고종 때 다시 문조로 추존되었다.
신정황후(1808-1890)는 풍원부원군 조만영의 딸로 1819년 효명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834년 부군인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흥선대원군의 차남 고종을 왕위에 올린 후 수렴청정하였다.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했다
홍살문 아래 참도와 배위의 위치가 특이하다.
홍살문 안쪽에서부터 참도(향로와 어로)가 시작되고, 배위도 홍살문 안쪽에 있는 것이 통상인데 여기는 홍살문 보다 바깥에서 시작된다.
정자각이다.
정자각 뒤에 설치된 신교(神橋) 또는 신도(神道)이다.
선왕과 왕비가 신문과 신교를 통해 능침으로 되돌아간다.
예감 또는 망료위라고 한다. 제사가 끝난뒤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오른쪽에 있는 수복방이다. 여기는 왼쪽의 수라간이 보이지 않는다.
수복방이 신축 건물인 것으로 보아 수라간도 새로 지으려나 보다.
신도비와 표석을 보호하는 비각이다.
문조와 신정황후의 합장릉이다.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봉분안에 오른쪽에 문조, 왼쪽에 신정황후가 안장되야 맞는데, 그 반대로 되어있다고 한다.
전체 석물은 국조오례의에 부합하는데, 단릉의 경우와 동일하게 설치되었고 병풍석만 설치되지 않았다.
능침공간의 보호를 위해 진입금지 되어 있어서 뒷산에서 망원으로 뒷면만 찍었는데, 아래 사진은 팜플렛에 나와있는 전면의 사진이다.
이 사진에 보면 문인석과 무인석의 사이에 경계가 없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중계와 하계로 나누던 차별의식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옆길을 따라 다음 순서인 원릉으로 가면서 본 정자각과 능침공간의 옆면 모습이다.
다음은 영조와 정순왕후의 쌍릉이 있는 원릉이다.
원릉(元陵) - 제21대 영조(英祖)와 두 번째 부인 정순왕후의 능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는 제19대 숙종의 넷째 아들로 1724년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붕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백성들을 두루 살폈다. 조선 최장수 왕으로 보령이 83세에 이르며 재위기간은 52년이다.
정순왕후(1745-1805)는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영조의 첫 번째 부인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759년 15세 나이에 66세 영조의 두 번째 부인으로 책봉되었다. 사도세자의 손자인 순조 때에도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누렸다.
여기는 홍살문 안쪽에 참도와 배위가 설치되어 있다.
정자각에서 내려다 본 홍살문쪽 풍경이다.
푸른 소나무와 함께 참나무 등이 어우러져 있어서 가을 단풍 때면 단풍이 아름답겠다.
왼쪽 수라간과 오른쪽 수복방의 모습이다.
비각이 다른 능 보다 크고 세 칸으로 되어있다. 비각 안에 영조의 신도비가 두 개가 들어있다.
영조는 승하시 묘호를 영종으로 하였다가 고종 27년에 묘호를 영조로 바꿔서 신도비가 두 개가 되었다.
쌍릉의 뒷모습이다. 오른쪽이 영조의 능이고 왼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혼유석만 각자 하나씩 두 개이고 다른 석물은 단릉과 동일하다.
영조의 능
정순왕후의 능
삼연릉인 경릉으로 이동하며 나무 사이로 보이는 원릉의 모습이 아름답다.
금천교를 지나 경릉의 경내로 들어선다.
경릉(景陵) - 제24대 헌종(憲宗)과 첫 번째 부인 효현황후, 두 번째 부인 효정황후의 능헌종(1827-1849, 재위1834-1849)
은 요절한 문조(효명세자)의 아들로 1834년 할아버지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8세에 즉위해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순조의 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15세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동문휘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삼보조감] 등을 완성하였으며, 각 도에 제언을 수축하게 하는등 치적을 남겼다.
효현황후는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로 1837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효정황후는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로 효현황후의 뒤를 이어 1844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여기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 좌우로 박석을 깔아 두 개의 도로를 덪붙여서 참도가 엄청나게 넓다.
여기도 수복방을 새로 지었다. 수라간의 모습은 안보인다.
자그마한 비각에 비석도 하나뿐이다.
하나의 비석에 세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새겼다.
역시 삼연릉의 후면 모습이고, 위에서 내려다 본 사진은 팜플렛에서 따온 사진이다.
오른쪽이 헌종 능이고, 가운데가 첫부인 효현황후 능, 가장 왼쪽이 둘째부인 효정황후 능이다.
삼연릉 역시 혼유석만 각 능 앞에 하나씩 배치되고, 다른 석물은 단릉처럼 배치됬다.
헌종의 능
첫 번째 부인 효현황후의 능
두 번째 부인 효정황후의 능
옆면에서 본 능선과 정자각의 모습이다.
석양에 조금은 쓸쓸해 보인다. 크고 화려한 능도 죽은 뒤엔 알기나 할까?
내려오는 길에 동구릉 역사문화관을 들린다.
어둑해질 무렵 동구릉 정문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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