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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강원도

<조선왕릉>영월여행, 영월 장릉(1)과 남양주 사릉(1) 191216

오늘은 이씨조선 임금 중에서 가장 비운의 임금 제6대 단종의 무덤인 장릉을 찾아 강원도 영월로 갔다.

 

 

단종(端宗)(1441-1457, 재위 1452-1455)은 제5대 문종의 아들로 1452년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세상을 뜨자 12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의 출산 후유증으로 출산 후 하루 만에 승하하였고, 단종의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1453)으로 권력을 잡자 1455년(단종 3) 세조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이 시도한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1457년(세조 3)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으며, 그 해 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물에 잠기자 영월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그 해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고 이를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영월 호장이던 엄홍도가 아들과 함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동을지산에다 묻었다.

그 후 단종의 묘는 방치되었다가 1541년(중종 36)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이 꿈에 단종의 혼령이 나타나자 관을 갖추어 다시 매장하고 봉분을 만든 뒤 제사를 지냈다.

사후 240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에 단종으로 복위되고 묘를 찾아 왕릉의 기본 골격에 맞게 왕릉으로 조성되었고 장릉(壯陵)이라는 능호가 주어졌다.

 

 

재실이다. 숙종 25년(1699)에 건축되었고, 이 곳에 능을 지키는 참봉 1인과 수호군 9인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 기구를 보관해오던 곳이다.

 

 

금천교를 지나 정자각으로 간다.

 

 

 

장릉은 조선시대 능묘 조성 규범인 국조오례의의 규정을 벗어나는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왕릉은 한양에서 100리 안에 조성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장릉은 예외일 수 밖에 없어 후대까지 유일하게 강원도 산골에 있는 왕릉이 되었다.

둘째로 장릉은 암매장한 무덤을 왕릉의 격식에 맞추어 조성하고 부속 건물을 배치했기 때문에 다른 왕릉과는 구조에 차이가 많다. 능침이 산자락 가파른 곳에 있기 때문에 제향시설을 일직선 상에 둘 공간이 없어 정자각이 능침의 측면을 올려다 보는 구조가 되었다. 또한 능침은 산자락 위쪽에 있고 재실에서 홍살문을 거쳐 수복방.비각.수라간.정자각으로 이어지는 건물들은 아래쪽 평지에 별도의 공간처럼 조성되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도 직선이 아니라 직각으로 굽어있다.

셋째로 능침공간의 장소가 협소하여 난간석과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고 무인석도 생략되었다.

 

 

 

 

 

능 제향을 올리는 정자(丁字) 모양으로 지은집이라는 정자각이다.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여기에 모신다.

지형의 구조상 산자락에 있는 능침의 측면을 향하고 있고 배치된 공간의 높이가 차이가 난다.

 

 

 

 

 

 

 

수복방이다. 능을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이다.

 

 

단종비각이다. 능 주인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세워두는 곳이다.

 

 

 

예감이다. 제사 후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수라간이다. 능에 제향을 지낼 때 음식을 준비하던 곳이다.

 

 

영천  :  제향 때 사용하는 우물이다.

 

 

 

 

보호수  :  수령 370년 수고 22m의 느릅나무

 

 

능침공간으로 가기 위해 산자락으로 오른다.

 

 

 

 

 

영월 호장 엄홍도가 암매장할 때 눈 덮인 산속에 노루 한마리가 앉아 있다가 도망 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 눈도 녹아있어서 명당임을 알아보고 매장 했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양지 바르고 사방이 탁 트여 시원하다. 능침공간에 난간석과 병풍석, 무인석이 보이지 않는다.

 

 

 

 

 

저 아래 각종 건물들이 납작 업드려 있는 듯하다.

 

 

 

 

부인 정순왕후가 누워있는 남양주 사릉에서 소나무 한그루를 옮겨 심어놓고 정령송이라 이름 지었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혼이라도 함께하라는 뜻에서 옮겨심었다고 한다.

 

 

장릉에는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건물과 시설들이 많다. 단종이 어린 나이에 강제로 왕위를 찬탈 당하고 목숨까지 잃은 비운의 왕이어서 그를 돕다가 목숨을 잃은 이들을 밝혀 영혼을 위로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거둔 엄홍도, 무덤을 제대로 다시 쓴 박충원 등의 기적비 등이 있다.

 

장판옥

 

이 건물은 정조 15년(1791)에 지은 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자군노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다.

 

 

 

 

 

이곳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위 장판옥에 배향된 268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엄홍도 정여각

 

이 비각은 엄홍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박충원 낙촌비각

 

이 비각은 박충원의 충신됨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73년에 세운 것이다.

 

 

 

 

 

 

 

 

남양주 사릉

 

어찌 단종만이 비운의 왕이었겠는가? 비운의 왕 뒤에는 일생을 혼자남아 한많은 세월을 보내고 죽은 후에도 가장 쓸쓸한 무덤의 주인이 된 정순왕후가 있다.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인 사능을 찾아 남양주 진건읍으로 간다.

 

 

조선왕릉 중 가장 조촐하고 고즈넉한 사능의 진입로는 우거진 수 천 그루의 노송과 철 지난 단풍의 말라버린 잎새가 임을 그리는 지고지순의 사부곡을 연상케 한다.

 

 

 

금천교를 지나 홍살문으로 간다.

 

 

 

정순왕후(定順王后)(1440-1521)는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단종 2년(1454)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의덕왕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세조 3년(1457) 단종복위운동 실패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고,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숭인동에 있는 비구니 승방인 정업원(현재의 청룡사)에서 생활하였다. 단종이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정순왕후는 매일 정업원 뒤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중종 16년(1521) 82세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숙종 24년(1698)에 정순왕후로 복위될 때, 단종을 평생 그리워하였다 하여 사릉(思陵)이라는 능호를 올렸다.

 

 

 

 

 

 

 

 

 

 

수복방 터이며 향후 복원할 예정이다.

 

 

수라청 터이며 향후 복원 예정이다.

 

 

비각이다. 안에는 정순왕후 능호를 표시하는 비석이 있다.

 

 

 

능침공간의 모습이다.

 

 

 

옆의 산정에서 망원으로 찍은 사진이다. 능침에는 단종의 장릉과 마찬가지로 난간석과 병풍석, 무인석이 생략되어 있다.

 

 

찾는 이는 없지만 능원에는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외로운 왕비의 영혼과 동무해주고 있다.

 

 

 

 

 

 

사릉 주변에는 해주 정씨들의 묘 12기가 자리하고 있다. 왕릉 주변에는 일반인의 묘가 있을 수 없는 일지만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단종의 친 누나인 경혜공주가 해주 정씨 정종에게 시집을 갔고, 폐서인이 되어 어려운 처지의 정순왕후를 도왔다. 정순왕후는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시양자로 삼았다. 그리하여 정씨네가 정순왕후 사후에 묻힐 곳 없는 정순왕후를 자기네 선산인 지금의 사능 자리에 묻어주고 제사도 지냈다. 정순왕후 복위 후 사능을 조성할 때 주변의 민묘들을 왕릉권 밖으로 이장하였으나, 이러한 사연으로 해주 정씨 묘역은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울창한 소나무가 뿜는 솔향을 마시며 언제까지고 외로운 정순왕후 옆에 있고 싶었지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사릉을 떠났다.

 

 

 

 

사릉 2차 답사 : 2023년 6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