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죽은 임금들의 집이 왕릉과 종묘라면, 살아있는 임금들의 집이 궁궐이다.
조선왕조 518년(1392-1910)간 27대 임금들이 한양 도성 안에 5개의 궁궐(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을 짓고 살았다.
한 왕조가 500년 동안 유지된 것도 흔치않은 일이지만 하나의 도시 안에 5개의 궁궐이 보존되어 온다는 것도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다.
오늘은 그 5대 궁궐 중에서 최초의 궁궐이자 왕조 마지막까지 영욕을 감내해 온 조선왕조 정궁 경복궁을 둘러본다.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왕조 개국 4년째인 1395년에 처음으로 세운 으뜸 궁궐이다. "하늘이 내린 큰 복"이라는 뜻으로 경복궁이라 이름 지었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목멱산(지금의 남산)을 안산으로 삼아 풍수지리적인 터잡기에서도 한양의 중심을 차지했다. 정문인 광화문 남쪽으로 관청가인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를 조성하고, 그 연장선 위에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 주요한 궁궐건물들을 일렬로 놓아, 왕조국가인 조선의 상징 축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진 후, 제2의 궁궐인 창덕궁을 재건하여 정궁으로 삼았지만, 경복궁은 재건을 미루어 270년 이상을 폐허로 남게 되었다. 1867년에야 비로소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경복궁을 재건했다. 고대 중국의 예법을 조선 왕실의 전통이나 현실과 조화시켜, 전체적으로는 규칙적 배치를 따르면서 부분적인 변화와 파격을 가미했다. 재건된 경복궁은 691,921m2의 광활한 대지에 약 500여동의 건물을 지어 하나의 작은 도시를 이루었다. 중심부에 정무공간을 두고, 좌우 뒤편으로 왕족의 생활공간, 그리고 곳곳에 정원시설들을 배열했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어 중심부의 일부 건물들만 남았고, 광화문을 비롯한 외전 일부를 헐어내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의 정면을 막기도 했다. 1990년부터 복원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원래의 흥례문과 행각을 복원했고, 왕과 왕비의 침전 및 왕세자가 기거한 동궁을 비롯하여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도 다시 복원하여 경복궁의 원래의 모습을 회복 중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 창건 당시 궁궐의 정문으로 세워졌다.
조선시대 궁궐은 동서남북 네개의 문을 세우지만 남문을 정문으로 하고 그 이름에는 될 화(化)자를 쓴다. 경복궁은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은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은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은 흥화문(興化門), 덕수궁의 대한문으로 바뀌기 전 이름인 경운궁은 인화문(仁化問)이다. 광화의 뜻은 " 광(빛, 군주의 덕)은 사방으로 덮이고, 화(교화, 바른 정치)는 만방에 미친다" 는 것이다.
광화문은 건물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권위있고 품위가 있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늠름한 자태는 마치 날개짓하며 하늘로 비상하는 듯한 모습이다. 양 옆으로는 긴 담장이 길게 펼쳐져 있어 왕조의 권위와 품위, 세상의 평화로움을 보여주는 듯하다.
경복궁은 광화문에서부터 흥례문 근정문까지의 3문과, 문무백관이 조회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외조공간인 근정전과 경회루, 정무를 보는 치조공간인 사정전,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연조공간)인 강녕전과 교태전의 3조가 왕궁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일직선상에 건물을 배치하고 엄정한 공간분할과 정연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금천이 흐르고 그 위를 영제교가 가로지르고 있다. 영제교에는 네 마리의 천록이 조각되어 있어 왕의 선정을 기다리고 있다. 네 마리 모두 표정이 다른데 그중 한마리는 혀를 낼름 내밀고 아이들이 '메롱'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경복궁의 심장, 근정전
근정문을 들어서면 경복궁의 심장인 근정전이 북악산을 배경으로 우람하게 서있다. 한국 최대의 목조건축물인 근정전은 왕과 나라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는 경복궁의 상징적 공간이다. 그 앞으로 넓게 펼쳐진 마당과 월대 위에는 오늘도 변함없이 많은 내외국 관광객이 무리를 지어있다.
중국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근정전을 보고 "자금성에 비하면 뒷간밖에 안된다." "자금성을 모방해 축소해 지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자금성의 24만평 규모에 비해 14만평의 경복궁이 규모가 작은 것(약 60%)은 맞다. 그러나 경복궁이 완공된 것이 1395년이고 자금성이 완공된 것이 1420년이니 경복궁이 25년 먼저 지어진 것으로 경복궁이 자금성을 모방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이야기이다. 또 자금성이 위압감과 장대함을 추구하여 인공적인 건축물이 주류를 이루는데 비하여 경복궁은 주변환경, 특히 북한산과 인왕산 등 자연과의 어울림이라는 건축미를 지니고 있어 오히려 그 아름다움이 나무 한그루 없이 건물만 늘어서 있는 자금성에 비할바가 아니라는 것이 세계 유명 건축가들의 평가이다.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큰 조회와 같은 국가적 행사를 치루는 정전으로, 사방에 행각을 둘러 넓은 마당을 만들었다. 앞마당에는 품계석을 두 줄로 세워 벼슬아치들이 도열하는 기준으로 삼았고, 바닥에 박석을 깔아 궁궐 안에서 가장 상징적인 공간을 이루었다.
근정전 내부는 2개층을 터서 높고 웅장한 공간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어좌를 놓아 왕의 권위를 공간적으로 상징화했다.
불규칙적이고 투박한 박석이 주는 질감이 중세 유럽의 광장의 돌바닥을 딛고 선듯한 느낌을 준다.
왕의 집무실, 사정전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매일같이 열렸다. 사정전은 공식 업무공간으로 마루만 깔려 있지만, 좌우의 만춘전과 천추전은 비공식 업무시설로서 온돌방을 두어 왕과 신하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사정전 앞의 행각에 천지현황 등 천자문 순서로 이름을 붙인 창고가 있어 왕실의 요긴한 물품들을 저장했다.
왕과 왕비의 침소, 강년전과 교태전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침전 영역을 이룬다. 사랑채에 해당하는 강녕전은 왕이 독서와 휴식, 신하들과 면담을 하던 곳이고, 안채에 해당하는 교태전은 왕비가 거처하면서 궁 안 생활을 총지휘하던 곳이다. 교태전 뒤편에 계단식 화단을 쌓아 아미산을 조성하고, 4기의 장식적인 굴뚝과 관상용 수석들을 배열해 정원을 만들었다.
강녕전과 교태전 건물에는 용마루가 없다. 이유인즉 왕은 곧 용을 상징하기 때문에 건물 자체가 용이 깃들어 있는 곳이므로 용마루를 얹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녕전
교태전
아미산 화계
경복궁 건축미학의 극치, 경회루
왕실의 큰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1867년에 재건되었다. 높은 2층 누마루에 올라 서쪽으로 인왕산, 동쪽으로 궁궐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며, 주위의 넓은 연못에서는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연못의 크기는 남북 113미터, 동서 128미터이고, 48개의 돌기둥 위에 세워진 이층 누각은 정면 일곱 칸, 측면 다섯 칸으로 남북 33미터, 동서 29미터로 누마루의 넓이가 282평으로 현존 목조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경회루의 사계
경회루는 2005년까지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으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북쪽 담벼락에 하향정이라는 육각정을 짓고 여기서 낚시를 했다는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현재도 누마루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4월부터 10월까지 7개월간 1일 3회, 회당 40명씩 인터넷 예약을 받아 누마루 특별관람이 허용된다.
4월부터 10월 중에 특별한 기간을 정하여 야간특별관람이 허용될 때는 사전 예약을 거쳐 달빛 아래 경복궁을 거닐 수도 있다.
궁궐 속의 작은 궁궐, 건청궁과 향원정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마친 뒤에, 고종 내외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1873년 건청궁을 궁궐 안 북쪽에 별도로 조성했다. 침전인 곤녕합, 옥호루와 왕의 사랑채인 장안당은 살림공간이고, 집옥재는 고종의 서재이며, 장안당의 앞에 있던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들고 향원정이라는 육각정을 지어 건청궁의 정원으로 만들었다. 곤녕합은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된 역사적 비극의 장소이다.
장안당
곤녕합. 옥호루
집옥재
향원정의 사계
이외에도 경복궁 경내에는 여러개의 부속 건물들이 있다.
대비전인 자경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에는 고종의 어머니인 철인왕후와 익종의 왕비인 신정왕후(조대비)가 살아있어서 이분들을 위한 별도의 건물이 필요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지정해준 조대비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경전이라는 장중한 건물을 지어주었다. 조대비는 여기서1866년까지 수렴청정을 했다.
동궁전인 자선당
왕세자가 사는 집이다.
죽음을 위한 공간, 태원전
경복궁 서북쪽 외진 곳에 있는 태원전은 죽은 이를 위한 빈전이다. 왕이나 왕비, 상왕이나 대비가 승하하면 그 시신을 모신 관이 능으로 옮겨질 때까지 머무는 건물이다. 저승은 서쪽이기 때문에 서쪽 궁장에 바짝 붙여 지었다.
훈민정음의 산실 수정전
경회루 바로 앞에 있는 이 건물은 세종 때는 집현전이 있엇던 곳으로 바로 여기서 훈민정음이 탄생한 산실이다. 집현전이 폐지된 뒤에는 예문관 등 일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장시간에 걸쳐 경복궁 도처에 어린 영욕의 역사에 울고 웃다가 근정전 월대 위에 세워진 원숭이상의 전송을 받으며 경복궁을 나온다.
'국내이야기 > 서울특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실 정원, 창덕궁 후원과 정자들 200111 (0) | 2020.01.12 |
---|---|
조선왕조 제2정궁, 창덕궁 200107 (0) | 2020.01.08 |
조선왕실 사당, 종묘 191228 (0) | 2019.12.30 |
메타세쿼이아, 서초문화예술공원 191120 (0) | 2019.11.27 |
만추, 양재시민의 숲 191120 (0) | 2019.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