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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서울특별시

조선왕조 제2정궁, 창덕궁 200107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은 1405년에 제2의 왕궁으로 창덕궁(昌德宮)을 창건했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하여 균형 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270여 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 왕조 제1의 정궁으로 역할 하였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동쪽의 창경궁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궐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궁궐 예제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복궁 역시 이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은 인위적인 제도를 벗어나 주변 자연 지형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다. 왕실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공간 구성은 경희궁, 덕수궁 등 다른 궁궐 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1917년에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들이 불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 옮겨 짓는 등 많은 건물들이 변형, 훼손, 철거되었다가, 1991년부터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은 조선 궁궐의 원형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있으며, 동궐의 후원은 한국 전통 조경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예로 평가된다. 1997년 12월 조선 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 사용되었고, 신하들은 서편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창건 당시 이미 종묘가 창덕궁 앞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돈화문은 궁궐의 서쪽 끝에 놓여졌다. 궁궐의 중심부가 동쪽에 있기 때문에 정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금천교를 건너 정전인 인정전 일곽과 연결된다.

1609년 재건된 돈화문은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아래층은 출입용으로, 위층은 감시 전망용으로 사용되었다.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출입시의 대기공간으로 사용했고, 원래는 여기서부터 종로까지 관청가가 조성되었다.

 

 

 

돈화문에서 진선문 가는 길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472호)와 단풍나무들, 공원 분위기가 느껴진다. 

 

 

금호문

 

 

금천교

 

 

금천교 건너편에 있는 궐내각사 건물들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이 궁궐 안에 설치되었고 이를 궐내각사라 부른다. 그 가운데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옥당),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약방),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 등이 중심 시설이었다.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으로 들어간다.

 

 

인정전(仁政殿) 일원

 

1609년에 재건된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신하들의 조회, 외국 사신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앞쪽으로 어도와 품계석을 둔 조정 마당을 마련해 국가적인 상징 공간을 이루고,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두어 뒷산인 매봉의 맥을 잇고 있다. 조정 마당을 둘러싼 내행각에는 호위대 주둔소와 창고 등을 두었으나 현재는 비어있는 회랑이 되었다. 외행각과 진선문, 숙장문은 1996년 복원된 것이다.

 

 

 

인정문과 숙장문

 

 

인정문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인정전 내부의 용상

 

 

인정전 천장, 왕의 공간임을 상징하는 봉황 한 쌍이 조각되어 있다.

 

 

인정정 월대

 

 

인정전 회랑

 

 

인정전 뒷편의 계단식 정원

 

 

선정전(宣政殿)

 

선정전은 궁궐의 편전(사무공간)으로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이다. 지형에 맞추어 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매일 같이 열렸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은 비서실, 창고 등으로 이용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선정전에 청기와를 올린 것과 앞쪽 선정문까지 복도각 건물로 연결한 것이 특징이다. 선정전은 한 때 혼전(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쓰였는데, 복도는 그 때의 흔적이다.

 

 

선정전 청기와

 

 

성정전 앞 복도각

 

 

선정전 내부

 

 

희정당(熙政堂)

 

원래 왕의 연구실인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비좁은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편전으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를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건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 전면에 자동차 승하차를 위한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바로크풍의 가구를 갖추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희정당은 마지막 황제 순종이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하면서 창덕궁의 핵심 건물로 부상했다.

 

 

큰 인물을 만드는 집, 대조전(大造殿)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이며 왕실의 큰 행사도 자주 열렸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침전으로 안대청을 사이에 두고 왕과 왕비의 온돌방이 설치되었다. 원래의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를 결정했던 비운의 장소이며, 행각과 복도로 여러 부속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1917년에 불에 타 없어진 터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마지막 왕비였던 순정효황후의 거처로 해방 후까지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유한 장식과 벽화, 문살 등이 잘 남아 있다. 뒤편에 4단의 계단식 정원을 만들어 후원으로 삼았고, 누마루를 뒤편으로 돌출시켜 이를 감상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건축적으로 대조전은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건축 형식을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궁궐 건축에서만 보인다. 임금이 머무는 대조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은 임금이 곧 용이기 때문에 두 용이 부딪치지 않도록 한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

 

 

내전의 복도 건물

 내전의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 세 건물은 지붕이 있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 복각(復閣)이라고 하는데 이 복각이 생활공간으로서의 편리성을 보장한다.

 

 

대조전 화계

장대석을 4단으로 쌓아올린 화계 위로 붉은 벽돌과 검은 기와가 어우러진 꽃담장이 높직이 올라앉아 있다.

 

 

사라진 동궁의 정당, 중희당(重熙堂)

 

후원으로 들어가는 큰 길이 있는 자리에는 세자의 생활공간인 중희당이 있었는데, 고종 28년에 이를 헐어버리고 후원으로 들어가는 큰길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현재는 정당 좌우의 부속 건물만 잔편으로 남아 있다. 대조전 화계를 돌아나오면 바로 만나는 성정각(誠正閣)이 동궁의 맨 서쪽 건물이고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 건너 오른편에 있는 육각정자인 삼삼와(三三窩)와 월랑인 칠분서(七分序), 서고인 승화루(承華樓)가 동궁의 동쪽 잔편들이다.

 

 

후원으로 가는 길

 

 

 봄이 오는 것을 알린다, 성정각 보춘정(報春亭)

왕세자의 독서와 서연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 희우루(喜雨樓)

 

 

희우루 앞 자시문 밖에 두 그루의 만첩홍매화가 아름다운 꽃을 피울 때면 관광객과 사진가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동쪽 잔편들, 삼삼와 칠분서 앞에는 멋있는 만첩홍매화 한그루와 진달래, 산수유의 봄꽃이 있어 인기를 끄는 명소가 되었다.

 

 

서고인 승화루

 

 

낙선재(樂善齋) 일원

 

낙선재의 주인공은 조선 24대 왕 헌종이다.

헌종은 8세에 등극하여 재위 기간이 15년이지만 할머니 안동김씨 순원왕후의 섭정으로 안동 김씨에 가려 빛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문예를 사랑하는 문명군주였다.

헌종은 명헌왕후에게서 후사가 없자 1847년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이하여 중희당 동쪽에 낙선재,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 등을 지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를 모신 곳이었다. 헌종의 뜻에따라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외형을 지녔으며, 또한 외국 문물에 대한 왕의 기호를 반영하듯 낙선재 창살무늬와 상량정의 건축 양식 등에서 청나라 양식을 볼 수 있다.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며, 대청마루 앞 주련에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 옹방강의 글씨가 있다.

 

 

낙선재 권역

 

 

낙선재로 들어가는 대문 장락문이다. 장락문 앞에서 보면 사랑채 누마루의 팔작 지붕이 활개를 펴듯 시원스레 뻗어있고 그 너머로  평원루 육각정자가 높직이 솟아 낙선재의 뒤뜰이 높고 깊음을 암시한다.

 

 

헌종은 낙선재를 짓고 질박함을 앞세우는 뜻으로 단청을 하지 않았으며, 이곳에 문인들을 초청하여 함께 시서화를 즐기곤 했다. 궁궐 건물인데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여염집 사랑채 같은 느낌을 주는 낙선재에 기거한지  2년만에 경빈 김씨와의 사이에서도 후사를 얻지 못한 채 23세의 새파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낙선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창살이다. 수직.수평선만 사용하는 창살이지만 격자.만자.마름모꼴 능화.사방연속 무늬 등을 두루 사용하여 모두 다르게 디자인 했다.

 

 

'낙선재' 현판은 추사의 친구인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葉志詵)의 글씨이다.

 

 

경빈의 처소인 석복헌

 

 

순원왕후를 모신 수강재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잇는 아기자기한 돌계단 화계

 

 

한정당과 상량정

 

 

낙선재의 이왕가 여인들

 

순정효황후 이후 낙선재에는 고종과 귀비 엄씨 사이에 난 순종의 이복 동생 영친왕 이은이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나라가 망하고 일제에 의해 일본 왕족의 딸 마사코(이방자 여사)와 정략 결혼을 하였고, 말년에 귀국하여 이방자 여사와 낙선재에서 지내다 두 분 다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했다.

 

또 고종이 환갑 나이에 낳은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끌려가 대마도주와 정략결혼 당했다가 정신분열증으로 돌아와 수강재에서 말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황세손 이구가 2005년 7월 16일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뒤 낙선재로 운구해와서 9일장으로 7월 24일 장례를 치렀다.

 

이로써 조선왕조의 적통은 끊어지고 왕손들이 창덕궁과 맺은 인연도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