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이야기/서울특별시

조선왕조 별궁, 덕수궁 200208

 

덕수궁의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도성 내 궁궐이 모두 소실되어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가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 행궁으로 사용하면서 궁궐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광해군이 1611년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이 되었다.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3층 카페에서 본 덕수궁 전경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고 새로이 전각들을 건축하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으뜸 궁궐로 삼았다. 으뜸 궁궐의 격에 맞는 궁궐 조성을 위해 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하였으나 이미 자리 잡은 미국, 영국, 러시아 공사관과 선교사 주거지로 인해 궁역의 경계가 불규칙해졌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 예원학교와 덕수초등학교, 옛 경기여고 일대를 포함하는,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현재의 덕수궁 영역 외에 서쪽에는 생활공간인 중명전 일원, 북쪽에는 역대 임금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선원전 일원이 있었다.

 

 

1907년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이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궐내각사의 일부를 철거하여 동측 궁역이 축소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인 1920년부터 중명전과 선원전 일대가 민간과 공공기관에 매각되면서 덕수궁의 궁역은 더욱 줄어들어 지금에 이른다.

 

 

 

대한문 일원

대한문의 본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는데 190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동문이었던 대안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1970년에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으로 물러앉게 되었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하여 정비한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 앞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 행차로였다.

 

大漢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하늘과 함께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았다.
금천교
중화문으로 가는 중심로

 

 

중화전 일원

1902년에 임시 정전으로 쓰던 즉조당 남쪽에 행각을 두르고 중화전을 건축해 궁궐의 중심 영역으로 삼았다. 중화전은 원래 중층 건물이었으나, 대화재로 이 일대가 모두 불타버린 후, 1906년에 단층으로 규모를 줄여 재건하였다. 중화문과 행각도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재 행각은 동남쪽 모퉁이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과 그 앞마당인 조정은 국가 의례를 치르기 위한 상징 공간이다. 2단으로 월대를 마련하고 바닥에 박석을 깔았으며 품계석과 삼도를 설치하는 등, 전통 궁궐 격식을 따랐다.

 

정전인 중화전은 1905년 1월 복원 공사에 착수했는데 당시 나라의 재정이 넉넉지 못해 전처럼 중층으로 짓지 못하고 지금의 모습처럼 단층의 단출한 규모로 축소했다. 그래서 궁궐의 위용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쓸쓸한 최후를 느끼게 한다.

 

용상
용상 위 천정의 용그림

 

2단 월대
품계석

 

 

즉조당 일원

이 일대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했던 전각들을 보존한 곳이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석어당(昔御堂)은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석어당은 현존 유일의 목조 2층집으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다. 1623년에 대부분의 전각과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이 두 건물만은 보존하여 경운궁의 상징으로 삼았다. 준명당은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세 건물은 1904년에 불에 탄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덕수궁 안에 유일하게 단청이 없는 건물인 석어당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행궁으로 삼은 곳이라 옛 석(昔), 어거할 어(御)를 써 '옛날에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으로 '석어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석어당은 성종의 큰형인 월산대군이 살던 집으로 당시에는 보기 드문 2층집으로 규모도 상당하고 생기기도 늠름하다.

 

즉조당 정면
즉조당 뒷면
고종이 즉조당 곁에 준명당을 짓고 두 건물을 돌기둥 복도로 연결했다.

 

 

함녕전과 덕홍전

함녕전은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으로 1919년에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된 후에 다시 지었다. 대청마루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들였고, 사방 툇간에 방을 두른 전형적인 침전 건물이다. 함녕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전돌로 만든 유현문과 장식적인 굴뚝들을 설치했다.

덕홍전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접견하던 곳으로, 1911년에 건립한 전통 양식의 건축물이지만, 내부는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하는 등 서양풍으로 장식했다.

 

함녕전/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으며 화재 탓에 3년간 중명전에 있었던 기간을 제외하면 고종은 줄곧 여기서 기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덕홍전
함녕전과 덕홍전 뒤쪽 높은 지대엔 널찍한 화계가 있고 그 옆으로는 꽃담이 지형에 따라 높낮이를 달리하며 감싸고 있다. 꽃담 사이에는 유현문이라는 그윽한 이름의 아름다운 근대식 벽돌 기와 나들문이 있다.

 

 

정관헌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 세운 휴식용 건물로 이름에 걸맞게 조용히 궁궐을 내려보고 있다.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건물로,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 I. Sabatin)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줄지어서 내부 공간을 감쌌고, 동남서 세 방향에 베란다를 마련했다. 베란다의 기둥은 목조이며 기둥 상부에 청룡, 황룡, 박쥐, 꽃병 등 한국의 전통 문양을 새겼다. 이 한양(韓洋) 절충의 이국적 건물 안에서 고종은 커피를 마시며 외교 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 한다. 

 

뒤쪽의 성공회 건물

 

 

석조전 일원

석조전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세운 서양식 석조건물로, 영국인 건축가 하딩(J.R.Harding)이 설계하여 1910년에 완공하였다. 기단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중앙에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얹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을으로 지었다. 건물의 전면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했고, 1938년에 서관을 증축하면서 그앞에 서양식 분수정원도 조성했다. 서관은 의석조로 지은 몸체 중앙에 코린트식 기둥의 현관을 덧붙인 모습이다.

 

석조전은 덕수궁의 상징이다. 정확히는 대한제국의 상징적 건물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구상되어 일제에 나라를 강탈당한 1910년 준공되었으니 제국과 운명을 같이한 셈이다.
1938년 석조전 서관이 완공되면서 창덕궁에 있던 이왕가미술관이 옮겨왔고 그때 분수대도 만들어졌다.
석조전 옆에 있는 이 서문을 나서면 미국대사관과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곳에 중명전이 있다. 그러나 이문으로는 갈 수 없고 돌아서 가야한다.
중명전은 황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는데 경운궁 내에서 가장 오래된 양관이다.

 

 

광명문

원래 광명문은 침전인 함녕전의 남쪽 대문이었다. 1938년에 석조전 서관을 증축하여 이왕가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내부에는 자동 시보 장치가 있는 물시계 자격루(국보 제229호)와 1462년에 제작된 정릉동 흥천사의 동종(보물 제1460호)과 화약을 이용하여 100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인 신기전기화차 등을 전시하고 있다.

 

 

 

덕수궁은 유기적인 궁궐의 체제가 사라진 채 마치 '궁궐 공원'처럼 남아 있다. 8.15해방 후에는 태평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동쪽 담장과 대한문이 궁 안쪽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덕수궁은 계속 줄어들어 오늘날엔 기존 궁역의 3분의 1인 약 1만 8천 평에 중화전 권역, 함녕전 권역, 석조전 권역 등이 여기저기 별도의 공간인 양 흩어져 있다.

 

 

 

이렇게 덕수궁은 궁궐 체제가 파편화 되었지만, 면적이 열배가 넘는 창덕궁에 버금갈 만큼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궁궐이 풍기는 엄숙한 분위기가 옅어서 궁궐의 향기가 있는 공원에 온 기분으로 마음 편하게 거닐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덕수궁의 매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 중심가 중의 중심가인 시청 앞에 자리잡고 있는데다, 덕수궁 돌담길은 호젓한 분위기와 거기서 풍기는 인상이 너무도 낭만적이어서 이 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도 아랑곳 없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참조문헌 : 1. 덕수궁 내 안내표지판, 2. 유홍준 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