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271호.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5대궁 중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다. 광해군이 정원군(定遠君:元宗 : 인조의 아버지)의 집 근처인 색문동(塞門洞)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부사(府使) 신경희(申景禧)의 말에 따라 이곳의 왕기를 제압하기 위해 1617년(광해군 9)에 수백 호의 여염집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경덕궁을 짓기 시작하여 3년 뒤인 1620년 완공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경덕궁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등극한 인조는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그뒤 효종부터 철종에 이르는 10여 명의 임금이 살았다. 현종과 숙종은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에 화재와 수리가 특히 많았다. 숙종은 이 궁의 정전인 회상전에서 태어나 융복전(隆福殿)에서 죽었다. 경종은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함으로써 경덕궁에서 최초로 즉위식을 올렸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시호인 '경덕'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바꾸었다. 영조는 이곳에서 즉위를 했으나 몇 달만 이곳에서 지냈으므로 거의 빈 궁궐로 있었다. 1810년(순조 10) 순조가 이곳으로 옮겨 지냈는데, 1829년(순조 29)에 많은 건물이 불타 2년 뒤에 중건했고, 1834년 회상전에서 죽었다. 헌종도 이곳에서 즉위했으나 여섯 달만 머물렀으며 그뒤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흥화문
광해군이 경희궁을 창건할 때 정문으로 세운 건물로 궁성의 동쪽에 동향으로 배치하였다. 다른 궁궐의 정문이 2층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흥화문은 1층으로 지어졌는데 그것은 경희궁이 이궁(離宮)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경희궁을 말살하는 과정에서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박문사(博文寺)(이등박문 사당)의 절문으로 이용되었다. 그 뒤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변형되거나 파손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위치는 구세군회관 빌딩이 있는 곳이며, 1988년 경희궁복원계획의 일환으로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1908년(융희 2)부터 일제에 의해 궁궐의 서쪽에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기 위한 정지작업이 시작되면서 조선왕조의 5대 궁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25년 전매국관사로 궁궐의 동쪽이 분할되었고, 1926년부터 주요건물의 이전으로 말미암아 원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숭정전은 1926년 조계사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다. 1928년 흥정당은 광운사로 이건했고, 황학정은 사직단 뒤로, 흥화문은 1932년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으로 이축함으로써 결국 빈터만 남게 되어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1980년 학교를 서초동으로 옮기고 1988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2002년 현재 자정전과 숭정전, 숭정문 등을 복원하는 1차 복원공사를 마치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곧 바로 올라가면 숭정문에 이르게 된다.
숭정문 앞에 경희궁지가 소개되어 있고 여기에 경희궁의 규모와 역사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이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특히 경종.정조.헌종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정전 건물을 일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남아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복원된 것이다.
여러 각도에서 본 숭정전 모습
숭정전 주변 모습들
자정문으로 가는 길
자정전
경희궁의 편전이다.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초상화)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일제가 헐어내었던 것을 서울시에서 발굴하여 확인한 자리에 <서궐도안>에 따라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회랑과 열주
자정전 뒷쪽 화계
태령전 가는 길
서암(瑞巖)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 암천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는 왕암(王巖)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이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는다.
태령전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이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보관하였다.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2000년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숭정전의 동문으로 나와 궁궐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산책로를 따라 궁궐 둘레를 돌아본다.
궁궐을 둘러싸고 있는 빌딩군을 바라보며, 오랜 세월 풍상을 겪으며 겨우 목숨만 유지하고 있는 느티나무에서 권력의 부침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경희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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