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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경기도

<조선왕릉>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 여주 영릉과 영릉(2) 201016

2018년부터 진행돼 온 영릉(英陵 : 세종대왕릉) 유적 종합 정비사업이 이제야 끝이 나서 한글날(2020년 10월 9일)에 기념식을 하고 일반에게 완전 개방이 되었다.

 

지난 10월 1일부터 4일까지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문자올림픽대회에서 한글이 2009년의 제1회 대회에 이어 또다시 1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세계문자올림픽대회는 영어, 러시아, 독일 등 27개국 문자가 경합을 벌려서 가장 쓰기 쉽고, 가장 배우기 쉽고,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소리를 표현하는 문자를 기준으로 순서를 정했다고 한다.

여기서 1위는 우리의 한글, 2위는 인도의 텔루구 문자, 3위는 영어의 알파벳이 차지했다고 한다.

 

다른 스케줄을 다 덮어놓고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님이 계신 여주의 영릉으로 간다.

 

주차장부터 넓고 깨끗하게 잘 조성되어 있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이 널찍하게 잘 지어져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훈민정음과 함께 세종대왕 생애와 어진 등이 정리되어 있다.

 

 

자나 깨나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 국방을 튼튼히 하고, 천문과 지리, 아악 등의 제도를 정비 확립하고, 과학자를 우대하여 각종 생활 편의 도구를 만들어내어 백성들이 편하게 살도록 하고, 그래서 만들어 낸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가 되었다. 반만년의 한반도 역사이래 가장 위대한 성군이었고, 이 후로도 다시 보기 어려운 지도자이다.

 

 

입장료도 500원으로 다른 곳의 반값이다. 그나마 어린이와 노인은 무료이다.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고,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동원상하릉이다.

한문으로는 다르지만 한글로는 같은 영릉이라서 합쳐 부를 때는 영녕릉이라 부른다.

 

 

이제 막 정비를 끝낸 터라 아직은 좀 엉성하지만 멀지 않아서 단풍 명소로도 이름이 날 것 같다.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가면 세종대왕릉이고, 오른쪽으로 1km(도보 15분) 정도 가면 효종대왕릉이다.

 

 

세종대왕릉 광장이다.

세종대왕의 동상이 있고 주변으로는 생전에 백성의 생활과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각종 과학기구의 모양을 복원하여 설명과 함께 설치했다. 일부 몇 개만 사진으로 올려본다.

 

 

불타버린 원래의 재실을 복원하여 원래의 자리에 새로 지은 재실이다. 

내부에는 한글날 준공식을 하면서 국무총리가 기념식수한 앵두나무 한 그루만 외로이 있다.

 

 

구재실이다.

이곳에는 지금 세종한글 디자인 공모전 입상작들을 전시하고 있다.

 

 

능역의 넓이가 다른 능들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넓다. 역시 민족 최고의 성군에게 바치는 예우답다는 생각이 든다.

 

 

연지이다.

이 당시에는 천자국만 원형 연지였고, 제후국은 사각 연지로 제한되었었다. 남양주의 고종황제릉(홍릉)의 연지는 원형이다.

 

 

금천교도 시원스럽다. 이곳을 넘으면 속세를 지나 성역으로 들어간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가 길기도 하다. 운동 부족의 옛날 왕들에게는 걷기 운동하는 좋은 기회였겠다.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1395~1446)의 능이다. 하나의 봉분 아래 석실 2개를 붙여 왕과 왕비를 함께 안치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영릉은 14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겨올 때 봉분 내부를 석실에서 회격으로 바꾸어 조성하였고, 석물 중 망주석, 장명등, 석수, 석인은 단릉처럼 배치하였으나 혼유석만  2개를 설치하여 합장릉임을 나타내었다. 

 

 

향어로와 판위가 있고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거쳐 봉분이 일직선이 안되고 약간 꺾어져 있다.

 

 

정자각의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의 모습이다.

 

 

정자각의 앞과 뒤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능역을 사진 찍고 싶어서 관리사무실에 부탁하여 사진만 찍도록 허락을 받았다.

 

 

영릉은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제도를 따랐다. 봉분 둘레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횡석주를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능의 위치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으로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세조 이후 영릉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 등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하나의 봉분에 두 개의 혼유석을 배치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고 있다.

 

 

영릉을 여주로 옮긴 이후, 그 능지가 천하의 명당이라 조선의 국운이 100년이나 더 연장되었다며 '영릉가백년'이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릉은 장헌대왕(세종)이 묻힌 곳인데, 용이 몸을 돌려 자룡으로 입수하고, 신방에서 물을 얻어 진방으로 빠지니 모든 능 중에서 으뜸이다'라고 적혀 있다.

 

 

비각으로 간다. 비석에는 '조선국 세종대왕영릉 소헌왕후 부좌'라고 쓰여있다.

 

 

능지기가 근무하는 수복방이다.

 

 

제사 때 재실에서 만들어 온 음식을 젯상에 올리도록 준비하는 수라간이다. 앞에 있는 작은 사각 돌은 산신석이다.

 

 

제례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이다.

 

 

세종대왕릉 답사를 마치고 왕의 숲길을 따라 효종대왕릉으로 간다.

이동거리가 약 700m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린다고 되었다.

 

 

열흘 정도 후에 왔으면 단풍이 아름다운 숲길이 었을 텐데 아쉽다.

 

 

효종대왕 능역은 공사를 하지 않아서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홍살문이다. 여기는 산지의 구조상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 거리가 매우 짧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1618~1674)의 능이다. 효종대왕이 1659년에 돌아가시자 처음에는 구리시 동구릉에 능을 조성하였으나, 병풍석에 틈이 생기는 문제가 일어나자 1673년(현종 14)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1674년(현종 15)에 효종대왕의 비인 인선왕후가 돌아가시자 왕후의 무덤을 같은 언덕의 아래에 조성하여 조선왕릉 중 최초로 동원상하릉 형식이 되었다.

영릉은 왕의 무덤에만 곡장을 둘러 왕후의 무덤과 구별하였고 나머지 석물의 배치와 규모는 동일하게 갖추고 있다. 봉분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횡석주를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12지를 한자로 새겼다.

과거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풍석을 세우지 않던 전통이 선릉(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때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가, 영릉에서부터 또다시 사라지게 된 셈이다.

 

 

참도(향로와 어로)와 판위

 

 

대부분의 조선왕릉의 금천교가 홍살문 앞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여기는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과의 사이에 향어로 위에조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수복방

 

 

수라간

 

 

정자각

 

 

정자각에서 본 앞뒤의 모습

 

 

여기는 능침이 개방되어 있어서 가까이서 봉분을 볼 수 있다.

위가 효종대왕릉이고 아래가 인선왕후릉이다.

동원상하릉이란 말은 같은 정원에 위와 아래로 봉분이 배치되어있다는 뜻이다.

 

 

먼저 인선왕후릉으로 간다.

여기는 능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곡장)이 없다. 그래서 왕후 무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위쪽이 효종대왕릉이다.

 

 

여기는 곡장이 있다.

앞에는 사진 찍는 곳까지 표시해 놨다.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선이겠지.

 

 

봉분과 난간석 사이에 봉분을 둘러싸고 있어야 할 병풍석이 없다.

 

 

비각으로 내려온다.

 

 

비문은 '조선국 효종대왕영릉'이라고 되어있다.

 

 

금천교를 지나고 홍살문을 거쳐 입구로 내려오면 재실이 있다. 

 

 

조선왕릉의 재실들이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어 원형이 훼손됐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효종 영릉 재실은 조선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보물(제1532호)로 지정되었다.

 

 

영릉 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