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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서울특별시

<조선왕릉>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 서울 의릉(1) 201203

서울시내에 마지막 하나 남은 미답사 조선왕릉 의릉으로 간다.

의릉(懿陵)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20 (석간동)에 있다.

시내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길이 복잡하다.네비 주소는 '의릉 주차장'이다.

 

 

 

의릉(懿陵)은 조선 제20대 임금 경종과 그의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의 능이다.

 

경종(景宗 1688~1724, 재위 1720~1724)은 제19대 숙종과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났다. 1690년(숙종 16)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자식이 없어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시켰으나 이 일로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대립하여 옥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재위 4년에 37세로 창경궁 환취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1730)는 어유구의 딸로 1718년(숙종 44) 경종의 두 번째 왕세자빈이 되었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왕대비가 되었으며 1730년(영조 6) 26세로 경희궁 어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경종을 비운의 왕이라 부른다. 그러나 역사는 경종을 병들고 허약했던 왕으로 기록할 뿐 왜 병약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는 과연 태생이 유약하고 병약했던 것일까? 어쩌면 임금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유순하고 야심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다만 실록과 야사를 근거로 그의 면면을 짐작해볼 뿐이다.

 

 

 

학문에 힘쓰는 것을 중히 여겼던 숙종은 훗날 경종이 될 세자에게 늘 학문의 갈고닦음을 강조했다. 이에 세자는 4살 때 천자문을 익혔고, 8살 때 성균관 입학례를 치렀다. 실록은 '세자가 입학례를 행하는데 글을 읽는 음성이 크고 맑아서 대신들이 서로 축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이렇듯 경종은 조선의 여느 왕자들이 그랬듯 어린 시절 영특함을 칭찬받는 평범한 세자였다. 그러나 그가 14살이 되던 해, 경종의 일대기에 반전이라 할 만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다.

 

 

 

1701년 10월, 대신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전하, 지금 희빈(경종의 생모)이 설령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다고 하나, 춘궁(경종)이 걱정하고 마음 상할 것을 염려하여 조금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숙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록 세자의 생모라고 하나, 자신의 거처에 신당을 짓고 인현왕후를 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장희빈의 간악함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숙종은 희빈 장 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다.

 

 

 

사약을 받은 희빈 장씨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을 거듭했다. 숙종은 처음에는 청을 거절했으나 한때 부부의 연을 맺었던 여인의 마지막 소원을 끝내 거절하지는 못했다. 결국 세자를 희빈 장 씨에게 데려다주었고, 이때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독기 서린 눈빛으로 변한 희빈 장 씨가 세자에게 달려들어 세자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겨버린 것이다. 곁에 서 있던 환관들이 겨우 세자에게서 장 씨를 떼 내어 놓았지만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

 

 

 

이 일화는 장희빈의 간악함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경종에게 있어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경종은 평생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병환에 시달렸고 자식도 낳지 못한 채 승하하고 말았다.

 

 

 

어쩌면 경종의 짧은 생애는 혜성이 남기고 간 흔적은 아니었을까. 숙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왕위에 오르지만 정사를 돌보기 힘들었다. 경종은 자신이 항상 병환에 시달렸으므로 재위 기간 4년 동안 업적을 남길 기력도, 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몸이 성치 못했을지라도 경종의 따뜻한 성정은 실록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인현왕후를 마음으로 섬겼고, 살아서 자신에게 몹시 엄한 아버지였지만 숙종이 병석에 들자 십수 년 동안 약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실록은 경종 사후에 '받아들이는 아량이 넓으시어 무릇 대신들에게 가슴을 열고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었는지라, 식자들은 훌륭한 보좌가 없어 이상적인 정치를 도와 이루지 못하였음을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다.

 

 

 

의릉 전경이다. 입구에 금천교가 있고 곡선길을 조금 가면 홍살문이 있다.

 

 

여기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참도(향로와 어로)가 있고 판위도 잘 갖추어져 있다.

 

 

제향을 지내는 정자각이다.

 

 

축문을 태우는 곳, 예감이다

 

 

산신제를 지내는 곳, 산신석이다.

 

 

정자각 뒤로 능침 공간이 보인다. 여기도 능침 공간은 출입금지여서 올라가진 못한다.

 

 

의릉은 능침이 동원상하릉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역 위에 경종의 능이, 그 아래에 선의왕후의 능이 자리 잡고 있다.

왕과 왕비의 능을 옆으로 나란히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의릉은 능역의 폭이 좁아 산천의 좋은 기운이 흐르는 맥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능을 위아래로 배치한 것이다. 이러한 동원상하릉 형식은 영릉(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과 의릉 두 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

 

 

경종의 능에는 곡장을 두르고 선의왕후릉에는 곡장을 두르지 않아 구분을 하였고, 두 능 모두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둘렀다.

 

 

의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무인석의 후면에는 특이한 꼬리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다른 능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석호의 꼬리가 몸통을 지나 목 뒤까지 이어지도록 묘사되어 있다. 이도 다른 능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비각이다. 비문에는 '조선국 경종대왕 의릉 선의왕후 부'라고 새겨져 있다.

 

 

의릉에는 수복방과 수라간을 볼 수 없고 상설도 해설 표지목에 수복방터와 수라간터가 있다고 되어있으나 이마저도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