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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서울특별시

성균관과 은행나무 201107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을 답사하고 600년 된 은행나무를 보러 간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에서 좌회전하여 10분쯤 걸으면 성균관에 도착한다.

네 그루의 은행나무는 11월 첫째 일요일과 둘째 일요일 사이에 절정을 이룬다.

 

 

 

성균관 입구의 오른쪽에 안으로 들어가는 향문이 있지만 노랑 잎 절정의 은행나무를 즐기기 위해 담장 외곽을 돈다.

성균관의 정문인 외삼문을 끼고 좌우로 위치한 두 그루의 우람한 은행나무는 아름답다 못해 황홀한 지경이다.

 

 

외곽을 돌아가면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단풍나무 등이 고택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서편에 학생인 유생들이 드나들었던 또 하나의 향문을 통해 성균관 안으로 들어간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유일한 국립대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조선시대 지성의 산실이었다.

성균관은 1398년 태조가 건립하였으나 정종 2년에 불타고, 태종 7년(1407)에 재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잿더미가 된 것을, 선조 34년(1601)에 대성전과 명륜당이 재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성균관의 건물 배치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있어 아주 간명하다. 동무와 서무, 그리고 외삼문까지 일괄해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묘에서 해마다 봄가을에 지내는 석전제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성균관의 기본 구조는 강학 공간인 성균관(명륜당)과 향사 공간인 문묘(대성전)를 양대 축으로 이루어졌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왕조의 문신. 학자들이 거의 다 성균관을 거쳐갔지만, 왕조 말기인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강학 공간으로서의 성균관의 기능은 끝났고 문묘의 제향만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명륜당 앞에는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좌우로 길게 서 있다. 각각 정면 20칸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두 칸마다 아궁이를 설치하고 온돌을 놓았는데 14개의 방이 있고 한 방에 평균 5명씩 거처했다.

 

 

동재는 동향, 서재는 서향이다. 동재와 서재는 등을 대고 동재는 동쪽, 서재는 서쪽으로 출입문이 나 있다. 그 덕분에 명륜당 앞마당은 언제나 정숙한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사무공간의 문간채인 고직사의 고문이다

 

 

관리들의 사무공간인 정록청이다

 

 

성균관의 장서를 보관하던 도서관인 존경각이다.

 

 

영조 임금이 대사례를 행하고 그때 사용한 활과 화살을 보관해둔 육일각이다.

 

 

유생의 옷차림을 한 해설사가 관람객에게 해설을 하고 있다.

 

 

명륜당 은행나무이다. 나이는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21미터에 가슴높이의 둘레는 12미터에 달하는 웅장한 나무로 발달이 왕성하고 품이 넓다. 그중 동쪽의 나무는 한국전쟁 때 포탄을 맞아 가지가 일곱으로 갈라졌지만 이제는 상처가 회복되었다. 참고로 성균관의 은행나무는 네 그루 모두 숫나무여서 열매가 달리지 않는다.

 

 

쪽문을 통과하여 대성전으로 건너간다. 모델을 동반한 사진가들의 작품 활동이 한창이다.

 

 

대성전 뒤쪽 축대 위에서 본 명륜당 쪽 풍경이다. 더 이상 학생도 선생도 없는 성균관이지만 명륜당 앞마당에 은행나무 고목이 건재하기에 조선시대 지성의 산실이라는 역사의 향기가 여전히 그윽하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역대 성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 성현은 모두 열여덟 분이어서 '동국 문묘 18현'이라고 한다. 성균관의 문묘는 조선왕조 국가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대성전의 앞 뜰에는 두 그루의 향나무가 좌우에 서있고, 그 바깥에는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호위를 하고 있다.

 

 

명륜당의 동재와 서재처럼 여기에도 서무와 동무가 마주 보고 서있다. 전에는 여기에도 위패를 모시고 있었는데 지금은 비어있다. 동무의 앞쪽에 묘정비각이 있다.

 

 

대성전 쪽에서 바라본 외삼문과 좌우의 은행나무 모습이다.

외삼문은 대성전의 정문으로 배향된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문이라서 신문이라고도 부른다. 이 문으로는 임금도 드나들지 못하며 평소에는 닫혀 있고 봄가을 석전제 때에만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