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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국내성지174> 순교자의 딸 유섬이 묘 230522 주소 : 경남 거제시 거제면 내간리 산 53-2 관할 성당 : 거제 성당 (055-633-4040) 순례일자 : 2023년 5월 22일, 비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의 딸 유섬이의 묘소이다. 1801년 아버지가 순교할 당시 9살이었던 그녀는 거제도 관비로 유배되었다. 거제부사는 그녀를 거제읍 한 노파의 수양딸로 보냈다. 유섬이는 품위가 넘쳐 관노 무리가 감히 관비로 대하지 못했다. 대략 14세 때, 평생 동정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보였다. 그녀는 나이 16, 17세 때에 따로 작은 집을 지어 그 안에서 바느질만 하며 지냈다. 그녀는 나이 40여 세가 지난 후 예사 사람처럼 살았다. 고을 사람들이 그 정절을 알고, '유처녀'라고 불렀다. 그녀가 동정을 지킨 것은 오빠 유중철 요한과 이순.. 더보기
<아름다운성당> 거창 거창성당 230514 소재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창남1길 58 (대평리) 소속교구 : 한국천주교 마산교구 전화번호 : 055-944-0781 미사일자 : 2023년 5월 14일, 일요일 더보기
<국내성지075> 구한선 타대오 성지, 대산 성당 190214 [치명일기]에 따르면 구한선 타대오(1844~1866년)는 함안 미나리골(현재 함안군 대산면 평기마을) 출신이다. 신심이 돈독하고 믿음에 충실해 병인박해(1866년) 직전 리델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까지 가서 전교 활동을 했다. 박해가 일어나자 리델 신부는 충청도로 떠나고 구한선은 진주 인근에서 지내다 붙잡혔다. 그는 감옥에 갇혀 며칠 동안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심한 매질과 고문으로 성한 곳이 별로 없었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게 되자 관에서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본가로 돌아온 뒤 칠 일 만에 장독으로 죽었다. 나이 스물셋이었다. 순교자 묘는 1959년에야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후 교우들은 대산면 하기리 신대마을 신(愼)씨 묘역 안에 있던 순교자 묘소를 참배하기 시작하였다. 외교인 묘역 안에 있음을 .. 더보기
<국내성지074> 무두묘, 복자 정찬문 묘 190214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는 진주시 사봉면 출신으로 신자였던 아내의 권면으로 입교 영세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정찬문은 포졸에게 잡혀 진주 감옥에 갇힌다. 여러 번 심한 문초와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다. 특히 그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아기를 등에 업고 주먹밥을 나르던 부인 윤 씨의 격려는 그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쓰기까지 커다란 공헌을 했다. 결국 이듬해인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 순교자는 매를 많이 맞은 끝에 진주옥에서 그날 밤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죽은 뒤 그의 일가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 왔는데 머리를 가져오지 못한 채 하체만 장사 지냈다고 한다. 어찌하여 머리를 가져오지 못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순교자의 무.. 더보기
<국내성지073> 거제의 사도,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190214 복자 윤봉문 요셉의 가족이 거제도에 정착한 것은 1868년경이다. 병인박해 중에 윤사우 스타니슬라오가 양산 '대처'를 거쳐 이곳 진목성에 와 전교 활동을 폄으로써 활발하게 포교 활동이 이루어진다. 윤봉문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로 거제의 사도로서 형 경문과 함께 교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에도 열심이었다. 1888년 2월 7일(음) 옥포에서 체포된 윤봉문은 거제 부사 박병용의 호출을 받고 거제 관아로 끌려가 태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포졸들은 배교시키려고 심한 문초와 고문을 가했지만 순교자는 믿음으로 견디다 진주로 옮겨져 교살(絞殺)당해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37세였다. 순교자의 가족으로는 부인 진(診) 아녜스와 아들 학송 루카(당시 7세), 딸 송악 가.. 더보기
<국내성지072> 남의 문중산에 평장, 복자 박대식 묘 190213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는 1811년 김해시 진례면 시예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으며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부친 박민혁과 형제들은(대붕, 대흥, 대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병인박해를 만나게 된다. 병인박해 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으나, 1868년 무진박해 때 박대식은 조카인 박수연과 함께 붙잡힌다. 박대식은 경상 감영에서 연일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868년 8월 27일(음) 조카 박수연과 함께 참수 치명한다. 당시 박수연은 예비 신자 신분이었다. 박대식의 가족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 와 선산에 모시려하였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의 외인들이 반대하자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 삼 형제(종립, 종반, 종철)와 형제들이 마을 뒷산인 .. 더보기
<국내성지071> 소금장수 순교자, 복자 신석복 묘 190213 복자 신석복 마르코는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서 살았다. 명례 지방은 일찍이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신석복과 그의 가족들은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그의 형제들은 신석복이 순교할 때는 신자가 아니었고 훗날 모두 입교하였다. 신석복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병인 치명 사적'에 따르면 포졸들은 신석복이 신자인 것을 알고 동네로 잡으러 왔었다. 그러나 그가 장사 나가고 없었기에 포졸들은 며칠을 기다린 뒤 돌아오는 신석복을 길에서 체포한 것이다. 신석복은 대구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심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신석복은 1866년 2월 15일(음)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39세 때였다. 신석복의 유해는 그의 .. 더보기
<국내성지070> 경남지역 첫 본당, 명례성지 190213 낙동강변 언덕 위에 위치한 명례 성지는 오래전 밀양과 김해를 이어 주던 나루가 있던 곳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한 복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가 출생한 곳이며, 영남 지방의 네 번째이자 경남 지역에서 가장 일찍 본당이 설립된 곳으로(1897년) 한국인 세 번째 사제이자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서품된(1896년 약현 성당) 강성삼 신부(1866~1903년)가 사목하다가 돌아가신 곳이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태풍으로 전파된 성전(1928년 봉헌)을 축소 복원한(1938년) 것이다. 남녀석이 구분되어 있는 성전 내부와 벽을 향한 제대와 그 위에 모신 십자가와 성모상에서 초기 신앙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2011년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526호로 지정되었다. "나를 위해 한 푼도 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