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지

<국내성지132> 노고산 성지 191221 노고산 성지는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이후, 사형을 당하고 그대로 형장에 내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관가의 눈을 피해 모셨던 곳 가운데 하나로, 여러 처형장과 가까워 많은 순교자들이 임시로 매장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명의 외국인 사제, 곧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6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혔다. 그 뒤 이십 일가량 지나서 7-8명의 신자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시신을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신자들은 시신을 큰 궤에 넣어 현재 서강대학교가 자리한 노고산에 매장하였다. 4년 뒤, 시신을 훔쳐 낸.. 더보기
<국내성지114>여산 하늘의 문 성당 (백지사터, 숲정이, 배다리) 190622 여산 성지는 무진박해(1868년) 순교지이다.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3명에 이르며 그 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 (김성첨 토마스, 김성화 야고보, 성 손선지의 딸 손막달레나 등), 이들은 여산, 고산, 금산, 진산, 등지에서 잡혀왔는데, 고산 넓은바위에서 잡혀온 이들이 많았고, 여산옥, 숲정이, 뒷말, 배다리, 장터, 기금터, 백지사터 등지에서 순교하였다. 여산 성지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순교자들이 하늘 나라로 들어간 '하늘의 문'이다. 순교자들은 박해의 모진 고난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신앙을 고백하였다. 특별히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모습을 순교자들이 직접 증언한 '성령의 순교지'라 할 수 있는데, 참수형을 당한 숲정이는 '불의 순교.. 더보기
<국내성지111> 나의 성지순례 종착지, 어농성지 190516 천주교 어농 청소년 성지는 1987년 9월 15일 고 김남수 안젤로 주교가 축복하였고 2002년 8월 최덕기 바오로 주교가 "을묘 신유 박해 때 순교하신 선조들을 기리고 현양하기 위한 기념 성지"로 선포하였다. 어농 청소년 성지에서는 1795년의 을묘박해 때에 순교한 최초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 복자를 현양하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 야고보, 사촌 여동생 윤점혜 아가타 동정 순교자, 윤운혜 루치아 . 정광수 바르나바 부부 순교자, 이들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도왔던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와 경기도 동부 출신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조용삼 베드로,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심아기 바르바라, 정.. 더보기
<국내성지110> 성가정 성지, 단내성지 190516 단내 성가정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1804~1866년)와 정 베드로 순교자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단천리는 한국에 교회가 세워지던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와 연관이 있었던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한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인 단내마을(단천리)과 동산 밑 마을(동산리)은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 활동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천(동산 밑 마을)이 고향인 이문우 성인, 조증이 성녀와 조증이 성녀의 남편으로 이천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신 남이관 성인을 비롯하여 이호영 성인, 이 아가타 성녀 등 다섯 분의 순교 성인을 기념하는 성지이기도 하다. 단내 성지에서 기념하는 순교자들은 대부분이 가족 순교자들이고, 또한 남달리 극진한 가족 사랑을 보여 준.. 더보기
<국내성지109> 최양업신부 중심사목지, 배티성지 190407 배티 성지는 한국 천주교 박해기에 형성된 배티 교우촌에서 시작되었다. 이 교우촌은 1837년 5월 성 모방 베드로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이를 전후하여 배티 골짜기 이곳저곳에는 비밀 신앙 공동체들이 형성되었다. 박해 소설 [은화]의 무대가 된 삼박골을 비롯하여 동골, 절골, 정삼이골, 지장골, 발래기 등이다. 1850년에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1857년 주교 수품)가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설립하고, 배티 교우촌에 신학교 건물로 사용할 집 한 채를 마련하였다. 그 뒤를 이어 1853년 여름부터 신학교 지도를 맡게 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배티 교우촌을 본당으로 삼고 전국 다섯 개 도를 순방하였다. 현재 배티 성지에는 2014년에 문을 연 '최양업 신부 박물관'이 있다. 배티 인.. 더보기
<국내성지101> 병인순교100주년 기념성당, 복자성당 190405 복자 성당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의 묘소가 있다. 세 분 순교자는 본디 박해를 피하여 언양 죽령리 공소 지역에 살다가, 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여 경주 산내면 단석산 범굴로 숨어 살았으나 포졸들에게 붙잡혀 온갖 문초와 극심한 옥고를 치르고 울산 장대벌에서 1868년 순교하였다. 경주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에 매장되었는데, 1932년 대구 감천리 교회 묘지로 이장했던 것을 복자 성당 건립 정신에 따라서 1973년 10월 19일에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세 분 순교자는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데에 이어 절차에 따라 시복되었다. 묘소 뒤쪽에 있는 성당은 병인 순교 100주년 성당으로서 시복 시성 운동의 일환으로 교구민의 헌금으로 1970년에 봉헌된 성당이다. 성당.. 더보기
<국내성지098> 대구 천주교 요람지, 신나무골 190406 신자들이 나무 아래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신나무골'은 대구에서 서북 방향으로 20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신나무골 성지에는 경신박해 때 순교했다고 알려진 이선이 엘리사벳 묘역이 있고, 대구 지역 첫 본당터와 엘리사벳의 집(예수 성심 수녀회 은퇴 수녀들의 거처)이 있다. 원래 이선이의 유해는 한티에서 순교한 뒤 선산에 모셨다가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이곳 신나무골에 이장한 것이다. 본당터 안에는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흉상, 사제관과 과거 선교사들의 사진과 유물, 공소가 있다. 이 마을에 처음 신자들이 산것은 1815년 을해박해 때로 추측된다. 교우촌이 형성된 이후 샤스탕 신부가 방문한 것으로 추측되며, 다블뤼 주교와 최양업 신부와 리델 신부가 사목 활동을 했다.. 더보기
<국내성지093>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터, 천호 190322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천호(天呼) 성지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의 터전이다. 천호 성지에는 박해 시대에 다리실 교우촌(천호 공소)을 포함한 총 7개의 공소가 있었는데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각 지역은 산세가 험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 말할 정도로 첩첩산중이었다. 이런 곳으로 숨어들어 와 땅을 일구고 신앙생활을 하던 교우들의 피와 땀이 지금의 한국 천주교를 일구었을 것이다. 천호는 호남이 자랑하는 천주교의 대표적 사적지로 1866년 12월에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네 분인 이명서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한재권 요셉 성인과, 같은 해 8월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