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성지 썸네일형 리스트형 <국내성지018> 신앙의 길목이자 교차로, 연풍순교성지 180519 연풍순교성지는 초기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으로 연풍의 산간 지역은 신앙 선조들이 경상도로 피신하는 길목이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칼레 강 니콜라오 신부도 연풍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면서 교우촌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특히 최 신부는1849년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우다가 선종하여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묻혔다. 그 결과 연풍은 각처의 신앙을 이어 주는 교차로가 되었으며,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수 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체포되어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된다. 연풍 병방골(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은 황석두 루카(1813~1866년) 성인의 고향이고, 연풍 성지는 성인의 묘소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성인은 아내와 동정 부.. 더보기 <국내성지016> 무명 순교자들의 터전, 해미순교성지 141012 당산동성당 전신자 해미성지 순례 (2014년 10월 12일) 해미성지는 이름 모를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터전이다. 이름이 기록된 순교자는 132명에 이르지만 대부분은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들 가운데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해미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이유는 이곳이 서해안 방어를 위해 마련한 해미 읍성과 군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죄인들의 처형을 군인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충청도 서북부 내포 지방에서 잡힌 신자들 중 일부는 홍주와 공주로, 일부는 해미로 보내졌다.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면 목숨을 건질수 있었으나 한 번 알아 모신 하느님 아버지를 배반할 수 없다하여 순교에 이르렀다. 해미에는 조선 시.. 더보기 <국내성지010> 어머니의 성지, 당고개순교성지 180301 당고개 순교성지는 아홉 분의 순교 성인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이며 복자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곳이다. 당고개 성지는 가족들의 간절한 사연을 간직한 성인들이 많은 곳으로 특별히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을 찔레꽃 아픔이 매화꽃 향기로 가득 찬 어머니의 성지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젖먹이의 죽음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야만 했던 복자 이성례 마리아뿐 아니라 11남매 중 10남매를 잃어야 했던 손소벽 막달레나, 인간사 그 모든 것보다 신앙을 우선시하며 살았던 최영이 바르바라, 이경이 아가타, 또한 천국을 향한 신앙 교육을 중시한 가문의 아들들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끝까지 말씀에 의지하며 살았던 .. 더보기 <국내성지009> 평신도들의 순교터, 서소문순교성지 180303 서소문 성지는 조선시대 공식 사형 집행장으로,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과 최종 사형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다는 편의성,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칠패시장'이 있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처형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 처형장에서 순교하신 분은 신원이 확인된 분만도 100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44위가 시성되었는데 단일 순교지로는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하상 바오로와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성인 등이 있다. 또한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를 시복하셨다. 서소문에서 순교하신 신유박해 순교자 25위와 181.. 더보기 <국내성지008> 천주교인 전용 단두대, 절두산순교성지 180301 절두산(切頭山)은 예로부터 가을두(加乙頭), 잠두봉(蠶頭峰), 용두봉(龍頭峰) 등으로 불리어 왔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을 통과해 한양 근교까지 침범해 오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로 더럽혀진 한강을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겠다며 이곳에서 수많은 교인들의 목을 잘라 죽이게 되는데 (병인박해) 그때부터 이곳의 지명을 절두산(切頭山)이라 부르게 됬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66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서 절두산에 기념관을 건축했는데 기념관에는 성당을 비롯하여 27위 순교 성인과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성인 유해실, 그리고 박물관이 있다. 특히 박물관에는 교회의 귀중한 사료들과, 순교자들의 유품, 형구 등 3,500여 점 이상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 그 수나 규모 면에서 한국 천주교회를.. 더보기 <국내성지007> 사제들의 순교터, 새남터순교성지 180301 새남터 순교성지는 한국 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열네 분 가운데 열 한 분이 순교한 곳으로 이 가운데 여덟 분과 교회 지도자급 평신도 세 분이 성인 반열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성지 이다. 이 곳에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부터이다. 주 신부가 입국한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주 신부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생기자 주 신부는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가, 7년 뒤인 1846년 병오박해에는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기해일기'를 작성한 현석문 가롤로.. 더보기 <국내성지005> 백지사 형벌의 효시, 남한산성순교성지 180224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이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첫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일부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때에는 백지사(白紙死)라는 특이한 형벌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게 하는 형벌이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 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 쉽게 처형할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형벌이 바.. 더보기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