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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국내성지135> 성체 순례 성지, 김포옛성당 200129 인천교구 제2대 교구장 최기산 주교는 2015년 10월 16일 '성체 성지 선포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교구장 사목 서한을 발표하고, 11월 1일 김포 옛 성당을 성체 성지로 선포하였다. 신자들이 성체 성지를 방문하여 성체 안에 참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함으로써 성체 조배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라는 교회의 유구한 가르침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김포 옛 성당은, 초대 주임 김병호 신부가 1950년 대지를 매입하여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한국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2년 2대 주임 김피득 신부가 현재 성당 위치에 목조 성당을 건립하였다. 3대 주임 신원식 신부와 신자들의 노력 봉사, 미국의 구호물자와 해병대의 지원에 힘입어 1956년부터 언덕 정상에 새롭게 성당 터를 다지고 19.. 더보기
<국내성지134> 제물진두 순교성지 200129 제물진두는, 1868년 4월 20일(양력 6월 10일)에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의 이모 김씨(1810-1868년)와 남편 손넙적이 베드로(1800-1868년), 사위 백치문 요한 사도, 이 마리아의 손자 등 4명이 도끼로 참수당하여 순교한 곳이다. 또한 1871년 5월 3일(양력 6월 20일)에는 이승훈의 증손자 이연구와 이균구 형제, 이승훈의 손자 이재겸의 부인 정씨와 손명현, 신자로 추정되는 백용석과 김아지도 1871년 5월 18일(양력 7월 5일) 이곳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한편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을 받고 입국하였다가 1845년 4월 사제품을 받기 위해 작은 목선(라파엘호)을 타고 중국 상해로 떠났던 역사적인 곳이자, 1888년 7월 22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4.. 더보기
<국내성지133> 성모 순례지(성모당) 200129 2016년 교구 설정 55주년을 기념하면서 인천교구 제2대 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는 교구 신자들의 오랜 염원인 성모 순례지(성모당)를 조성하겠다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였다. 인천 교구는 이듬해 2017년 10월 13일 파티마 성모님 발현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기공 미사를 봉헌하였고, 1년 뒤인 2018년 10월 13일 제3대 교구장 정신철 세례자 요한 주교가 미사를 집전하는 가운데 성모 순례지로 봉헌되었다. 미사 때 교구장 정신철 주교는 "평화의 염원을 담은 성모당을 봉헌하며"를 주제로 사목 서한을 발표하고, 성모당을 교구 공식 순례지로 선포하였다. 특히 북녘과 맞닿아 있는 인천의 지역적 특성상 파티마 성모님의 메시지에 따라 '세계 평화'와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더보기
<국내성지130> 답동 주교좌성당 191128 답동 성당은 인천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주보성인은 바오로 성인이다. 1888년부터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에서 조선교구가 성당 대지를 물색하면서 성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지 매입을 결정한 파리 외방전교회는 빌렘 신부(한국명 홍석구)를 초대 주임 신부로 임명하고 1889년 7월 1일 제물포 본당(현 답동 성당)을 설립하였다. 1893년 3대 주임 마라발 신부(서요셉, 1893-1904년)가 본격적으로 성당 건립을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895년 정초식을 하여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었다. 1897년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1890-1933년)가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성당 건물은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933년 신자 수가 1,500여 명에 이.. 더보기
<국내성지031> 병인박해 순교자 3위비, 갑곶순교성지 181115 강화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고려 시대부터 외세와 격렬하게 충돌해 온 역사의 현장이다. 이런 강화 지역이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와 연이은 병인박해 때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조선 정부가 프랑스 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프랑스 함대가 바로 이곳 갑곶 돈대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결국 프랑스 군은 후퇴했으나 이 때문에 강화 지방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극심했던 박해의 하나로 기억되는 병인박해가 시작되게 된다. 이 박해로 1868년 최인서, 장치선, 박서방, 조서방 등이 강화 진무영에서 순교했고, 1871년 박상손, 최순복, 우윤집 등이 강화 갑곶 진두에서 효수되었다. 성지에는 순교자 3위비가 세워져 그분들의 넋을 .. 더보기
<국내성지030> 해상 경비 군영이자 천주교 신자 처형지, 진무영 순교성지 181115 진무영(鎭武營)은 조선 시대에 해상 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軍營)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병인양요(1866년)를 촉발시킨 서울 애오개('아현'의 옛 지명) 회장 최인서 요한, 장주기 성인의 조카 장치선, 박순집의 형 박서방, 조서방 등이 이곳 진무영에서 순교하였다. 진무영은 1700년(숙종 26년) 강화부에 그 본영을 설치하고, 1779년(정조 3년) 통어영을 병합하였다가 1789년(정조 13년) 다시 분리하였다. 특히 1866년의 병인양요 이후, 외국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여 쇄국 정책을 쓴 당시로서는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국방상 중요한 군영이었다. 강화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더보기
<국내성지029> 침묵의 순례지,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181115 한국 천주교회는 적게는 1만 명, 많게는 3만 명의 순교자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2천 명도 채 안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에 2001년 당시 인천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는 강화도에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하여, 이를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에게 봉헌하였다. 또한 이곳은 인천교구가 2004년에 설립한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과 인접하여 있어 젊은이들과 자연과 순교자들이 어우러지는 '침묵의 순례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양동산에는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무명 순교자들의 흔적을 묵상할 수 있도록 조성된 무명 순교자의 길이 있고, 묵주 연못, 무명 순교자상, 십자가의 길, 일만 위 순교자 현양탑,.. 더보기
<국내성지003> 첫 영세자 이승훈의 묘(반주골) 180219 우리나라 최초 영세자 이승훈은 1756년 태어나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서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또한 그는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혼인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대의 석학 이벽과도 교분을 맺은 이승훈은 사신이 된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영세 후 이벽, 정약전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가지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천주교회를 설립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되자 집안의 압력으로 천주교 신앙을 배교하면서 괴로워하였다.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왔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 정약용,..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