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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성지순례/수원교구

<국내성지004> 첫사제 김대건신부 묘, 미리내성지 180221

미리내 성지는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때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어 살았는데,

밤이면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은하수'의 우리말)라고 불리게 되었다.

 

병오박해(1846년) 때 순교하신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미리내에 안장되면서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성지에는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 그리고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이자 김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페레올 주교의 묘가 있으며,

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새남터에서부터 이곳으로 옮겨 와 안장하고 선산을 교회에 봉헌한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1976년, 수원교구에서 용인지방에 산재해 있던 무명 순교자 17위의 유해를 미리내 성지 내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성지에는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 성전, 79위 시복 기념 경당 등이 있으며,

미리내 성 요셉 성당에 김대건 신부의 성해인 하악골(아래턱뼈)이 모셔져 있다.

 

(한국천주교성지순례/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지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성 요셉 성당으로 올라간다.

 

 

 

 

 

 

 

성 요셉 성당 제대 앞에 김대건 신부님의 하악골이 모셔져 있다.

 

 

 

성당 위 쪽으로 무명 순교자 묘역을 찾아간다.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묘역을 내려와 103위  시성 기념 성전 쪽으로 간다.

 

 

 

 

 

 

103위 시성 기념 성전으로 가는 입구이다.

길 오른편에는 묵주기도의 길이, 왼편으로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되 있어 기도를 올리며 간다.

 

 

 

 

 

 

 

 

103위 시성 기념 성전이다.

한국의 초기 천주교회사는 곧 순교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혹한 박해를 받았고, 이에 따른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이 가운데 1839년 기해년부터 1846년 병오년 사이의 순교자 79위의 시복식(諡福式)이 1925년 7월 5일 거행되었고,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흥선대원군의 박해로 순교한 24위의 시복식이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천주교회는 모두 103위의 순교복자(殉敎福者)를 지니게 되었다.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요한 바오로 2세)가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諡聖式)을 거행함으로써 이들은 복자에서 성인의 품위로 오르게 되었다.

103위의 구성을 보면, 김대건 신부(성인이 된 유일한 한국인 성직자)와 평신도 92명, 파리 외방전교회소속 선교사 10명(주교 3명, 신부 7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당 의 대성전 내부

 

 

 

김대건 신부님의 종아리 뼈

 

 

성당의 지하 소성전,  평일에는 여기서 미사를 한다.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모신 묘가 있는 경당으로 오른다.

1846년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새남터에 감시 관헌들의 감시아래 방치되어 있었다.

신자 이민식 빈첸시오는 김 신부의 시신을 거두려고 40여일을 관헌들의 동태를 살피다 10월 26일 밤 시신을 거두어 지게에 지고 미리내로 달렸다.

새남터에서 미리내까지 먼 길을 낮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에 숨었다가 밤길을 달려 미리내의 자신의 선산에 시신을 안장했다.

 

 

 

 

 

 

경당

 

 

 

 

김대건 신부의 묘

 

 

 

순례를 마치고 성지를 내려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