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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성지순례/대구대교구

<국내성지097>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 한티순교성지 190404

한티 순교성지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이다.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를 전후하여 박해를 피한 교우들이 팔공산 중턱으로 숨어들어 1850년 말경에 한티는 큰 교우촌을 이루게 된다.

 

병인박해(1866년)가 진행 중이던 1868년 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많은 교우들을 그 자리에서 처형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박해 소식을 듣고 인근에 살던 교우들이 한티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 가고 있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하여 옮길 수가 없었기에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티 순교자들의 묘는 모두 37기로 박해 당시의 교우촌과 그 주위에 넓게 흩어져 있다.

그중에는 당시 공소 회장이던 조 가를로와 부인 최바르바라, 동생 조아기 그리고 서태순 베드로의 신원만 밝혀졌고, 그 외에는 신원을 알 수조차 없다.

 

현재 성지에는 박해 후 재건된 공소터가 보존되어 있으며, 개인 또는 단체로 숙식이 가능한 피정의 집이 있어 순례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국천주교성지순례/한국천주교주교회의)

 

 

 

 

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자리한 한티는 서쪽 가산(901m)과 남동쪽 주봉인 팔공산(1,192m)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산골은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자동차도 숨이차서 허덕일 때쯤 한티 순교성지 표지석을 보고 오른쪽 언덕길을 내려가니주차장 옆에 환영 배너와 함께 성지 안내도가 있다.

안내도를 자세히 보니 순교자의 무덤과 무덤을 잇는 순례길을 표시하는 빨간 점과 빨간 줄이 온 산을 덮고 있다.

4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닥치는 대로 죽이다 보니 시체가 온산에 퍼졌고 시체가 있는 곳에 그대로 묻다보니 이렇게 온 산이 무덤이 된 것이다.

 

 

 

 

한티의 순교자 묘역내에는 14m의 아주 큰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앞마당 우측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서있는데 이를 '한티마을사람'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하나는 한티마을이 존재했음을 뜻한다. 옛날 마을 어귀에 장승을 세우곤 했는데, 박해당시 불태워진 순교자의 마을이 십자가 뒷쪽으로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는 한티순교자를 뜻한다. 크고 작은 입석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순교한 한티의 남녀노소 순교자이며, 바닥의 둥근 돌은 칼날에 떨어진 순교자의 머리이다.

 

 

 

 

 

 

순교자 무덤이 있는 곳을 따라 십자가의 길이 이어진다.

십사처가 끝나는 곳에 박해 후에 재건된 공소터가 있다고 하는데 워낙 넓은 길이라 거기까진 가지 못했다.

 

 

 

 

 

 

대구대교구가 1980년대부터 성지조성 사업을 시작하여 2004년에 축성된 순례자 성당이다.

 

 

 

 

 

 

 

 

 

 

 

 

 

순례자 성당과 주변을 둘러보고 영성관과 피정의 집으로 올라간다.

성당과 영성관 사이에 있던 옛 교우촌은 철거됬는지 보이지 않고 새로운 공사가 진행중이다.

 

 

2,000년에 축성된 영성관이다.

영성관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을 대상으로 피정과 재교육을 하는 곳이다

 

 

 

 

 

 

다음은 1991년에 개관된 피정의 집으로 올라간다.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한다.

피정의 집은 누구나 머물면서 기도하고 독서하며 휴양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피정의 집과 영성관 개관이래 신학생, 성직자, 순례자, 외국인 순례자 등 많은 개인 및 단체가 피정 및 연수차 머물다갔다고 한다.

 

 

 

 

 

 

 

야외제대를 뒤로하고 산을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