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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서울특별시

<조선왕릉> 조선의 측천무후 문정왕후, 서울 태릉과 강릉(2) 201002

오늘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681에 있는 태릉(泰陵)과 강릉(康陵)을 답사하기로 한다.

태릉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능이고, 강릉은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쌍릉이다.

문정왕후는 남편인 중종과 같이 묻히기를 원하여 중종의 능인 정릉을 서삼릉에서 삼성동 봉은사 근처로 옮기고 자신도 사후에 남편 곁에 묻히려 하였으나, 비가 올 때마다 정릉이 침수되어 아들 명종이 이곳에 태릉을 조성하였다.

이 후 아들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능 옆에 강릉이 조성되었다.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조선왕릉 전시관이 있다. 여기서 조선왕릉에 대하여 체계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가 있다.

 

 

조선왕릉 전시관을 우회하면 키다리 개미취의 환영인사가 있고 바로 이어서 울창한 소나무 숲이 관람객을 반긴다.

 

 

태릉과 강릉의 갈림길을 지나서 왼쪽 길 태릉으로 들어서면 여기는 개천 위에 놓여있는 금천교가 아니고 평지에 돌다리를 놓아 속세와 능역을 구분하고 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는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1517년(중종 12) 중종의 세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명종(경원대군)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기간 동안 동생 윤원형과 함께 국정을 이끌었으며 을사사화를 일으켜 반대파를 제거하였다. 또 불교에 관심을 두어 승과시험을 부활시키고, 불교부흥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565년(명종 20)에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시대 반가의 여성들은 대부분 언문이나 천자문 등 소통에 필요한 기본적인 문자만 체득했을 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또 혼인하면 ‘남존여비(男尊女卑)’와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절대원칙에 따라 규방에 갇힌 채 가사노동에 종사하면서 오로지 남편에 대한 순종, 출산과 양육에 몰두하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길을 걸어야 했다.

여성이 남성의 부속물로 취급받았던 엄혹한 세월 속에서 문정왕후 윤씨는 뛰어난 학문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 축적된 조선의 모순을 타파하여 백성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던 일세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아들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펼치며 공론을 일삼던 사림을 척결하고 불교부흥과 신분개혁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조선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을사사화를 통해 확고한 권력을 장악한 문정대비는 과감하게 불교진흥정책을 편다. 승과를 부활하고 도첩제를 실시하여 15년 동안에 약 4,000여명에 달하는 승려를 길렀으며,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 같은 승려를 발굴하여 이후 임진왜란 때 호국불교의 영웅이 되는 기초를 놓았다.

또 문정대비는 인간 평등이라는 불교의 이념을 받아들여 적서를 차별하지 않았으므로, 서얼호통법을 제정하여  첩의 소생이 다른 집 적자와 통혼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기생 출신의 정난정이 종1품 의정부 좌찬성인 윤원형의 정실부인이 되어 종1품 정경부인의 직첩을 받은 사례는 지금도 사극의 주제가 되고 있다.

유교사상과 사림이 주류를 이루던 조선사회에서 문정대비의 이렇듯 급진적이고 과격한 정책들은 그녀의 죽음과 함께 더 이상 맥을 잇지 못했으며, 사관들에 의해 그녀는 역사속에서 희대의 악녀로 규정되었다. 이런 그녀의 시도는 비록 미풍으로 가라앉았지만 유교 원리주의에 사로잡힌 남녀차별의 완강한 분위기 속에서 측천무후에 비견되는 여성 권력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만으로도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태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참도(향로와 어로)의 길이가 유독 길다.

홍살문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의 모양새도 특이하다.

 

 

제향을 모시는 정자각이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앞뒤의 모습이다.

 

 

정자각과 능침사이의 신도가 다른 능에 비해 매우 길다.

 

 

제례를 마친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이다.

 

 

정자각 뒤에서 바라본 사초지와 능침의 모습이다.

흡사 소나무가 능침을 향해 읍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봉분 가까이는 접근할 수가 없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사진을 빌렸다.

문정왕후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 태릉의 석물들은 다른 능에 비해 1.5배에서 2배 가량 크다고 한다.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산신석이다.

 

 

태릉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비각이다. 비문은 '조선국문정왕후태릉'이다.

 

 

수복방이다. 수라간은 터만 남아있고 건물은 없다.

 

 

정자각을 뒤로 하고 울창한 솔숲을 지나 강릉으로 향한다.

 

 

 

태릉에서 강릉으로 넘어가는 길 주변의 공사로 인해 당분간 통행이 금지되어 차를 타고 외부로 나가 삼육대학 정문 옆에 있는 강릉 출입문을 통해 입장한다.

 

 

금천교이다. 여기는 금천교가 제대로 되어있다.

 

 

명종(明宗 1534~1567, 재위 1545~1567)은 1545년 12대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8년 후 친정하여 외척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국정은 문정왕후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하였다. 1567년(명종 22)에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순왕후는(1532~1575)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43년(중종 38) 경원대군의 부인이 되었고, 1545년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51년(명종 6) 아들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카 하성군(선조)을 양자로 입양하여 왕위에 올렸고, 8개월 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1575년(선조 8)에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홍살문에서 정자각, 능침이 일직선상에 있다.

 

 

정자각이다.

 

 

정자각에서 본 전후면의 모습이다.

 

 

밑에서는 능침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길 옆으로 접근이 가능해 능침에 올라본다. 능침의 뒷면 모습이다.

 

 

능침의 정면 모습이다.

 

 

쌍봉 각각의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혼유석을 각각 배치한 것 외에는 장명등, 망주석, 문무인석, 석호 석양 등을 합동으로 배치했다. 역시 석물의 크기는 태릉처럼 다른 능에 비해 큰편이다.

 

 

비각이다. 비문은 '조선국 명종대왕강릉 인순왕후부좌'라고 되어있다.

 

 

수라간 건물이고 여기는 수복방이 터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