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이야기/경기도

<조선왕릉>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 남양주 광릉(1) 201203

오늘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에 있는 세계유산 조선왕릉의 하나인 광릉(光陵)을 찾아본다.

광릉은 경기도 포천시 소홀읍 소재 광릉수목원과 길을 가운데 두고 포천시와 남양주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광릉수목원로에 진입하여 광릉까지 오는 길은 우람한 노송과 참나무들이 어우러져 울창한 숲길을 이루고 있다.

 

 

 

광릉 주차장(내비게이션 주소)에 차를 세우고 바로 매표를 하여 입장을 할 수가 있다.

 

 

왼쪽에 종합안내도가 있고 길 안내 표지판도 있다.

 

 

진행로의 오른쪽에 재실이 있다.

 

 

세계유산 표지석이 있고, 조금 더 앞에 하마비가 있다. 이 하마비는 조선왕릉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하마비로 제향을 지내러 온 왕조차도 이곳 하마비에서부터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속세와 성역의 경계를 이루는 금천교이다. 이 다리를 건너서부터는 신성의 세계이다.

광릉에서는 다른 조선왕릉에 비해 금천교에서 홍살문까지의 거리가 멀고 숲이 울창하다.

 

 

광릉숲길은 조선시대 세조능림으로 지정되어 560년 이상 보존된 곳으로 유네스코에서도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고, 봄가을에 일정기간만 개방이 된다.

 

 

언덕길에 홍살문이 서있다.

 

 

여기는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있는 참도(향로와 어로)와 판위가 없다. 원래부터 만들지 않았는지 나중에 없앴는지는 모르겠다. 상설도 해설에도 참도와 판위가 나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처음부터 만들지 않은 것 같다.

 

정자각에서 홍살문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참도와 판위의 모습은 없다.

 

광릉은 조선 제7대 세조(世祖, 1417~1468 : 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능이다.

 

세조는 1417년(태종 17)에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 대군시절에 왕을 도와 국가의 행정 실무를 맡았다.  그러다 형 문종이 죽고 조카 단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없애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1455년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며, 단종의 복위 운동을 하던 사육신 등 집현전 학자들을 죽이고 집현전을 폐지하였으며,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 국방력을 강화하여 여진족을 정벌하였고, 직전법을 실시하여 토지제도를 개혁하였으며, 국가제도의 정비를 위해 경국대전을 편찬하여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루었다. 1468년에 세자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돌아가셨다.

 

정희왕후는 윤번의 딸로 1418년(태종 18)에 태어나, 1428년(세종 10)에 수양대군과 혼인하였고 145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세조 사이에서 2남(추존 덕종, 예종)1녀를 낳았으며, 1469년에 예종이 돌아가시고 성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1476년에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며, 1483년에 온양 행궁에서 돌아가셨다.

 

 

 

세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의견이 많이 갈린다. 과연 세조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냉혹한 야심가인가, 아니면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의 기반을 튼튼하게 했던 부국강병의 군주인가. 모두 다 세조의 모습이다. 다만 자신들이 보고 싶은 세조의 모습에 더 큰 무게를 두는 것일 뿐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세조의 이면에는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아버지 세종에게 극찬을 받았던 모습도 존재한다.

 

 

 

세조는 조선시대 그 어느 왕보다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많이 베푼 왕이었다. 실록은 곳곳에 세조의 술자리 베풂을 기록하고 있다. 신하와 함께 거나하게 취한 세조의 인간적인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세조의 술자리는 공신들을 단합하기 위한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둔 것이었으며 술자리 이상의 무절제를 본인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자를 향한 절제의 가르침 또한 잊지 않았다.

 

 

 

광릉은 정자각을 가운데 두고 왼쪽 언덕에 세조릉 오른쪽 언덕에 정희왕후릉을 모신 조선왕릉 최초의 동원이강릉이다.

 

 

풍수가 들은 광릉을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한다. 자리가 좋아서 이후 400여 년간 세조의 후손이 조선을 통치했다는 설명도 있다.

 

 

정자각의 모습이다.

처음에는 정자각이 세조릉 쪽에 있었으나 정희왕후릉을 쓰면서 지금의 가운데 위치로 옮겼다.

 

 

비각이다

 

 

수복방이다.

 

 

수라간이다

 

 

수라간 뒤에 보이는 세조릉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경사가 무척 가파르다. 출입금지되어있어서 올라가지 못했다.

 

 

수복방과 비각 뒤쪽에 있는 정희왕후릉이다. 역시 높고 가파르며 출입금지구역이다.

 

 

능침 공간의 모습을 볼 수 없어서 팸플릿에서 스캔하여 대신한다.

 

 

세조의 유언으로 봉분의 석실 대신 회격으로 현궁(관을 묻는 방)을 만들고,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두었다.

이로 인해 왕릉 조성 비용과 인력을 줄였으며, 이 유언은 후대에도 지켜져 조선왕릉이 도굴의 위험에서 안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