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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경기도

<조선왕릉> 고양 서오릉(5), 명릉 익릉 경릉 홍릉 창릉 201225

유네스코에 등록된 남한 소재 조선왕릉 40기 중에서 26기를 답사 완료하고 이제 남은 왕릉은 14기가 남았다.

그동안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남쪽에 있는 왕릉을 답사 완료했고, 이제 남은 14기는 주로 서북쪽에 있다.

오늘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용두동)에 있는 서오릉의 왕릉 5기를 하루에 답사하기로 한다.

 

 

 

서오릉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다섯 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구리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 왕실의 왕릉 군이다.

왕릉의 조성 연대순으로 보면 아래 표와 같이 창릉 경릉 익릉 명릉 홍릉의 순서로 되어있지만, 답사의 편의상 매표소에서부터 진행 순서대로 본다면 명릉 익릉 경릉 홍릉 창릉의 순으로 되어있어서 본 블로그에서는 이 순서대로 서술한다.

그리고 왕릉 외에도 두 기의 원과 한 기의 묘가 있어서 이들도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매표소를 지나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이 명릉이다. 금천교를 지나면 바로 홍살문이 있다.

 

 

명릉 전경이다. 시원스레 자리 잡은 정자각 뒤에 두 곳의 언덕에 능이 보인다.

 

 

홍살문, 참도(향로와 어로), 판위, 정자각, 수복방은 보이는데 왼쪽에 있어야 할 수라간이 보이지 않는다.

 

 

명릉(明陵)은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의 능이다. 

 

 

숙종肅宗(1661~1720, 재위 1674~1720)은 제18대 현종의 아들로 1674년에 현종이 세상을 떠나자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숙종 대의 조선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당파의 싸움이 심했지만, 숙종은 각 당파의 싸움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체제 전반을 정비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인현왕후仁顯王后(1667~1701)는 여양 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인경왕후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1681년(숙종 7)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두 번째 왕비가 되었다. 인현왕후는 기사환국(1689년)으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1694년) 때 복귀되었다.

 

인원왕후仁元王后(1687~1757)는 경은 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702년(숙종 28)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대왕대비가 되었다.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의 능을 조성하고 명릉으로 명명하였고, 1720년(경종 즉) 숙종의 능을 쌍릉으로 조성하였다. 1757년(영조 33)에 서쪽 언덕에 인원왕후의 능을 조성하여 동원이강릉이 되었다.

 

 

명릉의 참도(향. 어로)는 조선 왕릉 참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홍살문에서 참도 , 정자각, 능침이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참도도 신이 다니는 향로, 임금이 다니는 어로가 분명하고, 양 옆으로 신하들이 다니는 '변로'가 따로 조성되어 있다.

 

 

오른편에 있는 수복방이다. 새 건물인 걸로 봐서는 유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 같고, 왼편의 수라간은 아직 복원이 안됐다.

 

 

제향을 모시는 정자각이다.  동원이강릉의 경우에 대부분 가운데 지점으로 정자각을 이설 하는데 여기는 인원왕후릉이 왼쪽 후면으로 약간 빗겨 앉았지만 정자각의 이설은 없었다.

 

 

비각이다. 내부의 비석에 쓰여있는 비문은 다음과 같다.

왼쪽 비석에는 "조선국 숙종대왕 명릉 인현왕후부좌"라고 쓰여있고, 오른쪽 비석에는 "조선국 인원왕후부우강"으로 쓰여있다.

 

 

능침 공간이다. 앞에서 봐서 왼쪽 봉분이 숙종이고 오른쪽 봉분이 인현왕후이다. 봉분의 크기가 동구릉의 다른 능들보다 작은 느낌이다. 석물들의 크기도 낮고 작다. 이는 인현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숙종이 경비 절감을 위해 크기들을  작게 하라고 명령하여 그리된 것이라 한다.

 

 

뒤에서 본 봉분과 곡장의 모습이다. 둘 다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둘렀다. 이는 제7대 세조의 유언에 의한 것으로 세조 이후의 왕릉 조성에 잘 지켜지고 있다.

 

 

쌍릉 쪽에서 본 건너편 언덕 위의 인원왕후 능이다. 

 

 

 

명릉을 지나면 바로 재실이 있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맡은 능참봉이 상주하는 곳으로,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곳이다.

 

 

 

재실을 지나서 울창한 숲길을 조금 걸으면 익릉에 도달하게 된다.

 

 

익릉은 서오릉에서는 가장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익릉(翼陵)은 제19대 임금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인경왕후仁敬王后(1661~1680)는 광성 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1671년(현종 12) 11세 때 세자빈이 되었다가 1674년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숙종과의 사이에 공주 둘을 두었으나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

 

 

익릉은 1681년(숙종 7)에 조성되었으며, 구리 동구릉의 숭릉(시아버지인 제18대 현종의 능)의 양식을 따랐다.

 

 

땅의 경사 때문에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향. 어로는 계단식으로 하고 박석을 깔았다.

 

 

정자각은 맞배지붕 건물에 좌우에 익랑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봉분에는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둘렀다고 하는데 밑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수복방은 역시 근래에 복원한 것 같고, 수라간은 아직 복원이 안됐다.

 

 

비각 안의 비석에는 "조선국 인경왕후익릉"이라고 쓰여있다.

 

 

 

다음은 경릉으로 간다.

 

 

경릉은 금천교를 지나면 홍살문이 길가에 붙어있고 지대가 낮은 곳에 있어 답답한 느낌이 든다.

 

 

경릉(敬陵)은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이다.

 

 

덕종德宗(1438~1457)은 제7대 세조의 맏아들로 1455년(세조 1)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기 전 20세에 세상을 떠나 시호를 의경세자라 하였다. 의경세자는 둘째 아들 성종이 임금이 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昭惠王后(1437~1504)는 서원 부원군 한확의 딸로 1455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457년(성종 6)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인수대비가 되었다.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내훈內訓]을 책으로 펴내고 한문 불경을 한글로 풀어쓰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왕의 능, 오른쪽에 왕후의 능을 조성한다. 이와 달리 경릉은 반대로 오른쪽에 왕을, 왼쪽에 왕후를 모셨다. 이는 세상을 떠나 왕릉을 조성할 때의 신분의 차이 때문이다. 덕종은 세상을 떠났을 때 왕세자의 신분이었고, 소혜왕후는 세상을 떠났을 때 대왕대비의 신분이었다.

 

 

같은 사 유로 해서 능침도 왼쪽 소혜왕후의 능은 왕릉의 격식과 형태를 따라서 조성되었고

 

 

오른쪽의 덕종의 능침은 묘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비각 안의 비석에는 "조선국 덕종대왕경릉 소혜왕후부우강"이라고 쓰여있다.

 

 

여기도 수복방만 복원되었고 수라간은 없다.

 

 

 

다음은 언덕길을 올라 홍릉으로 간다.

 

 

금천교 너머 홍릉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홍릉(弘陵)은 제21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능이다.

 

 

정성왕후貞聖王后(1692~1757)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704년(숙종 30) 숙종의 둘째 아들인 연잉군(영조)과 가례를 올렸다. 1724년(경종 4)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평생 숙종과 경종의 왕비를 극진히 모시며 내명부를 지켰다. 1757년(영조 33)에 소생 없이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자각의 모습들

 

 

홍릉의 전체적인 배치는 쌍릉 형식이나,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능의 왼쪽이 비어 있다. 이는 영조가 생전에 정성왕후와 함께 묻히려고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비워 두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조의 능이 현 구리 동구릉의 원릉에 조성되면서, 현재에도 그 자리는 비어 있다.

 

 

비각 내의 비석에는 "조선국 정성왕후정릉"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도 수복방은 근래에 복원된 듯하고 수라간은 없다.

 

 

 

이제 금천교를 넘어 서오릉 마지막 왕릉인 창릉으로 간다.

 

 

창릉(昌陵)은 제8대 임금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의 능이다.

 

 

예종睿宗(1450~1469, 재위 1468~1469)은 제7대 세조의 둘째 아들이다. 세자였던 형(의경세자, 덕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세자로 책봉된 후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 동안 각 도의 병영에 속한 전답인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게 하여 백성들을 경제적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안순왕후安順王后(?~1498)는 청천부원군 한백륜의 딸로 1463년(세조 9)에 세자 후궁 소훈이 되었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창릉은 서오릉의 영역 안에 왕릉의 형식으로는 처음 조성된 능이다(1470년 성종 1).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에 예종의 능, 오른쪽 언덕에 안순왕후의 능이 있다.

 

 

예종의 능

 

 

안순왕후의 능

 

 

예종 능침의 고석이 북고리 무늬로 조각되어 있다고 브로슈어에 적혀있다. 일반적인 고석의 무늬는 귀면을 새기나 예종 능침의 고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북고리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자각의 여러 모습이다.

 

 

비각의 비석에는 "조선국 예종대왕창릉 안순왕후부좌강"이라 쓰여있다.

 

 

여기는 수복방과 수라간이 둘 다 복원되어 있다. 단청이 산뜻한 걸로 봐서는 최근에 복원한 듯하다.

 

 

 

이상으로 서오릉 내 왕릉의 답사를 마치고, 서오릉에 함께 있는 2기의 원과 1기의 묘에 대하여 살펴본다.

 

조선시대 왕족의 무덤은 그 지위나 신분에 따라 능, 원, 묘의 세 등급으로 분류된다.

능(陵)은 왕과 왕후, 황제와 황후의 무덤 (남한 40기 + 북한 2기)

원(園)은 왕을 낳은 후궁, 왕세자와 왕세자빈,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 (총 14기)

묘(墓)는 왕족이나 후궁, 폐위된 왕과 왕후의 무덤 (총 64기)

총 120기

 

 

먼저 명릉과 익릉 사이에 있는 수경원으로 간다.

 

 

수경원은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장조의황제(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 씨의 원이다.

 

 

다음은 익릉 다음에 있는 순창원으로 간다.

 

 

순창원은 조선 제13대 명종의 맏아들 순회 세자와 공회빈 윤 씨의 합장 원이다.

 

 

경릉에서 홍릉으로 가는 길 왼쪽에 있는 대빈묘로 간다.

 

 

대빈묘는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폐비 장희빈의 묘이다.

 

 

 

서오릉은 조선 제7대 임금 세조가 맏아들이자 왕세자였던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세에 요절하자 풍수지리에 따라 길지로 추천된 이곳에 친히 거동하여 능지로 정하면서 덕종과 그의 부인 소혜왕후(경릉), 둘째 아들인 예종과 안순왕후(창릉)가 묻힌 능지가 되었으며, 200년 후 제19대 숙종과 그의 여인들, 원비 인경왕후(익릉), 제1계비 인현왕후와 제3계비 인원왕후(명릉), 제2계비였다가 폐비된 장희빈(대빈묘), 그리고 며느리 정성왕후(영조 원비)(홍릉)까지 한 곳에 모이는 능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