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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누정/강원도

<한국누정069> 영월 숙종대왕어제시 요선정(邀僊亭) 220602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도원운학로 13-39(무릉리 산 139)
건립시기 : 1913년
문화재 지정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1984.6.2지정)
정자 규모 :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지붕
촬영 일자 : 2022년 6월 2일, 맑음


요선정(邀僊亭)은 무릉리 주천강변의 높이 60m쯤 되는 절벽 위에 올라앉아 있다. 본래 큰 절인 법흥사의 작은 암자가 있었던 곳으로 고려시대의 마애불과 무너진 오층석탑이 있었는데 언젠가 폐사되었고, 1913년에 이곳 주민들이 빈 절터에 정자를 세우고 요선정이라 이름 지었다.


요선정은 연륜도 짧고 정자 건물도 평범한 모습으로 잘생긴 것도 아니지만 답사의 명소가 된 것은 정자 건물이 아니라 여기서 내려다보는 주천강의 환상적인 풍광과 함께 숙종.영조.정조 세 임금이 주천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와 그 내력을 새긴 현판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정자에 세 임금의 글이 걸려 있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 아닐수 없는데 그 사연이 아주 길고 뜻도 깊다.


숙종은 200여 년 전 조선 초기에 일어났던 세조 왕위 찬탈의 과거사를 바로잡고 왕조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숙종은 노산군을 임금의 지위로 복위시키고 단종이라는 시호를 부여하고 종묘에 모셨다. 또 노산군의 묘를 왕릉으로 격상시켜 새로 조성하고 장릉이라는 능호를 부여했다. 이 일련의 작업을 위해 단종의 유배길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물어 살피다가 주천현에 빙허루와 청허루라는 두 누각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여기에 부치는 시를 지었다. 숙종은 이 시를 직접 써서 당시 원주목사인 심정보에게 내려주며 청허루에 걸게 했다. 이것이 숙종의 어제어필시문 현판이다.


그러나 그후 30년쯤 지나 청허루에 화재가 나 숙종의 어제시는 누대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얼마 뒤인 1758년에 원주목사 임집이 청허루를 중건하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선왕의 시를 직접 쓰고 임집의 뜻을 가상히 여긴다는 글을 덧붙여 써서 현판으로 걸게했다.


이리하여 청허루에는 숙종과 영조의 시와 글이 걸려 있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788년, 정조는 두 분 선왕의 글이 주천 산골 정자에 봉안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감회가 일어 이에 부치는 시를 짓고는 이 유적의 가치를 칭찬하는 글을 써서 현판으로 달게 했다. 이리하여 주천의 청허루에는 숙종.영조,정조 세 임금의 시와 글이 새겨진 현판이 걸리게 되었다.

요선정의 숙종 어제시 현판 / 숙종의 어제시를 새긴 현판이 소실된 후 영조가 다시 복원하면서 그 내력을 써서 만든 새현판
요선정의 정조 어제시 현판 / 1788년 정조의 시와 그 유래를 밝힌 글을지어 만든 현판


그러나 이 자랑스러운 두 누각은 세월 속에 퇴락하여 마침내 왕조의 말기에 와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세 임금의 글을 새긴 현판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에 마을 사람 김병위가 1909년에 이를 환수하여 보관했다. 그리고 1913년 이 고장에 사는 이.원.곽 3성씨의 친목계인 요선계의 원세하.곽태응.이응호 세 사람이 현판을 걸기 위해 요선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숙종.영조.정조의 친필시 편액을 봉안하였다. 정자 정면에는 요선계의 이응호가 쓴 '요선정''모성헌'이라는 현판도 걸었다.


그런데 얼마 뒤 주천면민들이 모금하여 읍내에 있던 빙허루를 복원하고는 이 어제 편액을 원래의 정자에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를 거부하는 요선계 사람들과 재판까지 가서 10여년의 송사 끝에 법원이 요선정에 그대로 봉안하는 것이 맞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편액은 요선정에 남게 되었다.


요선정은 본래 암자 자리였기 때문에 불상과 탑이 남아 있다. 정자 옆 큰 바위에는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고 마애불 앞에는 무너진 오층석탑이 있다. 탑이라고 해야 납작한 청석을 쌓아 층층이 체감해 올린 것으로 조촐하기 이를데 없고 마애불 역시 무슨 권위나 신비감 내지는 아름다움을 표현할 뜻이 보이지 않는다.


글 / 유홍준 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권에서 발췌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