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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서울특별시

이중섭, 백년의 신화 1609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회고전시회

기간 : 2016년 6월 3일 ~ 10월 3일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주최 : 국립현대미술관, 조선일보사,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전시도관 : 총 167 점

관람일자 : 2016년 9월 6일

 

 

이중섭 회고전이 이제 한달여 밖에 남지 않았다. 전시회 개최 초기에는 관람객들이 많이 몰려 줄서는 것이 싫었고, 그 다음에는 방학으로 학생 관람객이 많았고, 또 한여름에는 유난히 길고 극심한 더위에 관람을 하러갈 엄두가 나지않아 차일피일 하다가 이제서야 이중섭을 만나러 아내와 함께 덕수궁으로 향했다. 

 

 

 

 

이중섭 연보

 

1916년 9월 16일  :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탄생

1930년 3월  :  오산고등보통학교 입학 ( 미국 유학파 임용련 선생으로부터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았다)

 

1936년 1월 ~ 1943년 8월  :  동경시절 (일본 동경으로 유학)

1937년 4월  :  자유로운 분위기의 문화학원에 입학하여 미술교육을 받고 저명한 미술계 인사들과 교류

                    이시이 하쿠데이 교수로부터 턱이 긴 이씨라는 뜻의 '아고리'라는 별명을 받았다.

1939년  :  문화학원에서 나중 부인이된 야마모토 마사코와 만났다.

             

1943년 8월 ~ 1950년 12월  :  원산시절

1945년 5월 20일  :  일본에서 건너온 야마모도 마사코(山本方子)와 결혼 (한국명 이남덕(李南德)이란 이름 선물)

1945년 8월  :  해방된 조국에서 원산미술협회를 만들어 활동

1946년 3월  :  북조선 당국의 토지개혁으로 많은 전재산 몰수당함

1946년 10월  :  첫아들 태어났으나 디프테리아로 사망

1948년 2월 9일  :  둘째 아들 이태현 출생

1949년 8월 16일  :  셋째 아들 이태성 출생

1950년 12월 6일  :  아내 마사코와 두 아들을 데리고 해군함정LST편으로 월남

 

1951년 12월 ~ 1953년 3월  :  부산시절

부산 피난시절의 이중섭 가족은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활발한 창작활동 전개

1952년 7월  :  아내 마사코와 두 아들 일본 오사카 마사코의 친정집으로 건너 감

이때부터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화가 등장

그와 동시에 담배 보호용지인 은지를 긁어 그림을 새겨 넣는 은지화를 그렸다.

 

1953년 3월 ~ 1954년 6월  :  통영시절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의 미술강사로 출강하며 개인전, 단체전 등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1954년 6월 ~ 1955년 2월  :  서울시절

1955년 1월 18일부터 27일까지 개인전을 열고 전체 45점중  20여점이 팔렸으나 수금이 잘 안됨

 

1955년 2월 ~ 1955년 8월  :  대구시절

대구 미국공보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26점을 출품했으나 판매와 수금 저조

영양실조와 정신분열증세 그리고 거식증으로 대구 성가병원 입원

 

1955년 8월 ~ 1956년 9월 6일  :  서울시절

병이 호전되어 서울로 이전하여 성북구 정릉으로 이주

문학잡지의 삽화제작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돌아오지 않는 강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거식증, 영양실조, 황달병, 간장염, 정신분열증등의 합병증으로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사망 (40세)

 

 

이중섭 자화상  (1955, 종이에 연필, 48.5 * 31 cm, 개인소장)

 

 

 

 

유화

 

 

길 떠나는 가족  (1954, 종이에 유채, 29.5 * 64.5 cm, 개인소장)

국민화가 이중섭의 대표적 유화작품, 이중섭 붓끝에 평생 담겨 있던 두 가지..... 가족 그리고 소

일본인 아내 이남덕과 아들 둘이 탄 소달구지를 이중섭이 끌고 있다. 생이별한 가족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은 바람을 경쾌한 움직임과 색채로 표현했다.

 

 

 

 

황소  (1953-54, 종이에 유채, 32.3 * 49.5 cm, 개인소장)

황소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울부짖는 한 순간을 포착했다. 황소의 얼굴만이 클로즈업 되었는데, 포효하는 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에 강렬한 기운이 가득하다.

 

 

 

 

흰 소  (1953-54, 종이에 유채, 34.2 * 53 cm, 개인소장)

화면 왼쪽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움직이는 소의 형상을 표현했다. 이러한 동작과 자세는 이중섭이 즐겨 그리던 소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유독 '흰 소'를 좋아했는데, '흰 소'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상징이었다. 흰 옷을 입은 조선인, 인내심과 끈기로 역경 속에서 묵묵히 삶을 개척하는 조선인에 대한 암호 같은 것이 '흰 소'였다.

 

 

 

 

황소  (1953년경, 종이에 유채, 35.5 * 52 cm, 서울미술관 소장)

소 한 마리가 묵직한 다리를 움직여 느린 걸음으로 화면 왼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앞발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땅을 내디디려는 순간, 고개를 돌려 관객을 쳐다본다. 살이 없이 비쩍 말라 골격을 다 드러냈지만, 육중한 동작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어깨를 치켜 올리고 뿔을 치받으려는 소의 자세는 어떠한 역경도 극복할 수 있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을 느끼게 한다.

 

 

 

 

회색 소  (1956년경, 종이에 유채, 29 * 40.3 cm, 개인소장)

미완성작으로 추정 된다. 이중섭은 화면 왼쪽을 향해 움직이는 소의 형상을 즐겨 그렸는데, 이 소는 걷던 걸음을 갑자기 멈춘 듯 보인다. 다른 소에 비해 지쳐있고, 기운을 잃은 회색의 소이다. 이중섭이 1955년 중반 이후 정신적인 질환으로 고통 속에 있을 때 제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소  (1955년경, 종이에 유채, 27.5 * 43 cm, 서울미술관 소장)

몹시 마르고 지친 모습으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늘어뜨린 얼굴의 이마에는 상처가 나서 피가 묻어있고, 바닥으로는 선연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이중섭의 '소'는 여러가지 점에서 자신의 자화상이다. 가족과 곧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속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나 경제적으로 처참한 결과가 나온 이후 점차 절망속에 빠져든다. 이 '피 흘리는 소'는 작가 자신이 처한 비극적 현실을 여지없이 반영하고 있다.

 

 

 

 

바닷가의 아이들  (1952-53년, 종이에 연필, 유채, 32.5 * 49.8 cm, 금성문화재단 소장)

천진난만한 아이들, 뛰어 노는 물고기, 자그마한 조각배, 까마득한 수평선, 이글거리는 태양...

이 모든 그림의 소재들이 단순한 선들만으로 충분히 완벽하고 풍요롭게 그려졌다. 때로는 물고기가 아이들보다 크고, 배는 아이를 싣지 못할 만큼 작지만,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이 서로 엉키고 한데 어울려 지극히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

 

 

 

 

봄의 아동  (1952-53년, 종이에 연필, 유채, 32.6 * 49.6 cm, 개인소장)

다섯 명의 발가벗은 아이들이 제각각의 자세와 표정으로 봄날의 축복을 즐기고 있다. 나비를 잡고, 꽃대를 들고, 나뭇가지에 매달리기도 한다. 부드러운 산 능선을 따라 민들레가 자라고 개미가 기어 다닌다. 이중섭의 작품에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체가 한데 어울려 구분할 수 없이 뒤섞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 모두 어딘가 신체적으로 맞닿은 채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다.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7 * 36.4 cm, 개인소장)

세 명의 어린이가 각자의 물고기를 안거나 타고서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연결되어 있다. 물고기는 전통적으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데, 이 물고기들을 안고 있는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아무런 걱정도 재앙도 없는 세계이다. 태양에 그을린 듯 붉은 색조를 띈 아이들은 초록빛의 물고기와 보색을 이룸으로써, 화면에 강렬하고 싱싱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소와 새와 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32.5 * 49.8 cm, 개인소장)

소 한 마리가 몸통을 잔뜩 치켜 올린 채 관객을 향해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빨이 듬성듬성하게 나서 나이도 들고 힘도 다 빠진 듯한 이 소를 주위의 동물들이 놀려주고 있다. 게 한 마리는 심술궂게도 소의 성기를 꽉 깨물 태세이고, 새 한 마리는소의 뿔 위에 내려 앉아 조롱하듯이 재잘된다. 성가신 이들을 친구라고 해야 할지 적이라고 해야 할지..... 소는 그저 난감할 따름이다.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  (1953, 종이에 유채, 40.9 * 28.2 cm, 이중섭미술관 소장)

통영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화이다. 1950년대 통영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던 중앙동 일대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선착장의 아름다운 정경을 담았다. 전경에는 기와지붕들이 보이고, 화면 중앙에 남망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저 멀리 아름다운 한려수도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욕지도 풍경  (1953, 종이에 유채, 39.6 * 27.6 cm, 개인소장)

통영항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욕지도라는 섬이 있다. '도를 알려거든 석가모니의 도를 보라'는 말에서 유래한 '욕지도'는 천황산과 깍아지른 해안절벽이 장관을 이룬 곳이다. 바닷물이 맑고 깨끗하기로도 유명하다.

 

 

 

 

벚꽃 위의 새  (1954, 종이에 유채, 49 * 31.3 cm, 개인소장)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배경 위로 벚꽃 가지 하나가 화면을 가로 지른다. 마침 벚꽃은 꽉 차게 피어서 눈부시게 화려하다. 이 때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활짝 핀 벚꽃 위로 황급히 내려앉는 바람에, 꽃잎들은 하릴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떨어지는 꽃잎은 바닥에 가까울수록 천천히 내려앉는다. 흰 새가 가지에 앉은 것은 개구리를 향해 말을 걸기 위해서이다. 화면 위의 노란 나비는 나랑은 별 상관없다는 듯이 곧 화면 밖으로 사라지려는 참이다.

 

 

 

 

닭과 가족  (1954-55, 종이에 유채, 36.5 * 26.5 cm, 개인소장)

암탉과 수탉, 그리고 병아리들이 잔뜩 그려진 닭의 가족들이 사람들과 뒤섞여 어우러져 있다. 화면 아래 암탉과 수탉을  각각 안고 있는 인물들은 이 둘을 교미시키려 하고 있다. 수탉을 거꾸로 하여 항문에 바람을 불어 넣어서 흥분하게 해, 암탉에게 달려들게 하려는 것이다. 화면 위의 아이들은 병아리들이 가득 든 광주리를 이고 들고 장난 친다. 모두 반라의 모습으로 천진하기 그지없이, 그저 생리적 욕구와 유희에 충실할 뿐이다.

 

 

 

 

투계  (1955, 종이에 유채, 28.5 * 40.5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대각선으로 화면을 가르며 닭 두 마리가 싸움을 하는 장면이다. 오른쪽 위의 붉은 닭이 날아올랐다. 방향을 선회하며 공격을 하려 내려온다. 왼쪽 아래 푸른 닭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궁지에 몰렸지만, 부리를 꽉 열고 소리를 꽥 질러 필사적으로 응수하고 있다. 대각선 구도, 유려한 선의 흐름, 거친 표면 효과 등은 역동성과 운동감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들이다. 이 장치들을 통해 과격한 동작이 일어나는 한 순간을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호박꽃  (1954-55, 종이에 유채, 62 * 98 cm, 개인소장)

풍성한 호박넝쿨이 가득 화면을 채우고 있다. 호박꽃이 푸근하게 피고, 넝쿨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호박이 탐스럽게 영글어 간다. 분명 호박넝쿨을 그린 것이지만, 작품을 가까이에서들여다보면 마치 추상화를 보는 것처럼 자유로운 필획들이 화면을 지배한다. 매우 즉흥적이고 거침없는 표현은 작가의 격정적인 정신 상태를 반영한다.

 

 

 

 

왜관 성당 부근  (1955, 종이에 유채, 34 * 46.5 cm, 금성문화재단 소장)

왜관 성배네딕도 수도원의 성당이 아득히 보이는 가운데, 언덕길을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시인 구상의 가족  (1955, 종이에 유채, 32 * 49.5 cm, 개인소장)

시인 구상의 가족을 그린 작품이다.

 

 

 

 

가족과 비둘기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9 * 40.3 cm, 개인소장)

엄마와 두 아들은 함께 뭉쳐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고, 아빠인 이중섭은 화면 오른쪽에 조금 떨어진 채로 왼쪽의 무리에게 비둘기를 선사하고 있다. 이중섭이 가족과 헤어진 후 제작된 작품으로 멀리 있는 가족에게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비둘기'에 담아 보내는 모습이다.

 

 

 

 

나무와 달과 하얀 새  (1956, 종이에 크레파스, 유채, 14 * 19.5 cm, Museum SAN 소장)

흐릿한 풍경에 앙상한 나무들이 검은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바닥에는 엄마 나무, 아이 나무가 나란히 서 있고, 이들을 보호하는 듯 커다란 나뭇가지가 뻗어 나와 화면을 가로지른다. 이 나뭇가지를 터전삼아 일곱 마리의 새들이 재잘재잘 노닐고 있다. 저 멀리 노란 달이 이 모두를 따뜻하게 비추어준다. 달빛의 노란 기운은 작품 전체를 감싸고 돌며, 세상을 하나로 통일시켜 준다.

 

 

 

 

돌아오지 않는 강  (1956, 종이에 유채, 18.8 * 14.6 cm, 임옥미술관 소장)

한 소년이 자그마한 집 창문에 기대어 물끄러미 관객을 향하고 있다. 힘 없이 지친 표정으로 창틀에 얼굴을 기댄 채,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저 뒤에는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장에 갔다 돌아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관객들은 곧 어머니가 집으로 도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소년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다. 함박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은 이중섭의 절필작이다. 1956년 서울의 정릉 골짜기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제작된 것이다.

한국전쟁중 어머니를 북녘에 홀로 남겨둔 채 피란해 내려온 것에 대한 죄책감은 이중섭을 늘 괴롭혔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안은 채, 이중섭도 같은 해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드로잉

 

소  (1941, 종이에 연필, 23.5 * 26.5 cm, 개인소장)

이 작은 연필화는 마치 습작처럼 보이지만,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소 한 마리가 애써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소는 일제 식민치하의 조선인, 그리고 이중섭 자신의 자화상이다.

 

 

 

 

세 사람  (1945년경, 종이에 연필, 18.2 * 28 cm, 개인소장)

엎드리고, 쪼그리고, 드러누운,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한 세 인물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세 명의 인물들인지, 아니면 한 인물의 세 가지 다른 자세를 동시에 한 화면에 담은 것인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두 매우 우울한 표정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물고기와 동자  (1952, 종이에 콘테, 10.1 * 12.5 cm, 개인소장)

물고기를 안고 있는 어린아이를 매우 단순한 선으로 단번에 그린 드로잉이다. 아이는 엉덩이를 바짝 들어 올린 자세로 물고기를 안아주고 있고, 물고기는 그저 크고 둥그런 눈을 껌벅이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물고기의 입에서 나온 낚시줄이 이 둘을 둥근 원 안으로 감싸 안아주고 있다.

 

 

 

 

은지화

 

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 된다. 그렇게 해서 깊이 패인 선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드로잉이 완성되는데, 평면이면서도 층위가 생길 뿐 아니라 반짝이는 표면효과도 특징적이어서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 된다.

 

 

두 아이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8.5 * 15.5 cm, 개인소장)

서로 완전히 끌어안아 일체가 된 두 아이의 모습을 담은 은지화 작품이다.

 

 

 

 

도원(낙원의 가족)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8.3 * 15.4 cm, MoMA 소장)

복숭아나무가 가득한 도원을 새겨 넣은 은지화이다. 활짝 핀 꽃들과 싱싱한 이파리들 사이로 커다란 복숭아가 탐스럽게 열려 있다. 비둘기가 날고 나비가 나풀거리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아이들은 제멋대로 뒤엉켜 놀고 있다. 콧수염을 한 남자는 언제나 이중섭 자신인데, 그는 유난히 크고 잘 생긴 복숭아 하나를 바닥에 누워있는 여인에게 선사하고 있다.

 

 

 

 

가족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10 * 15 cm, 개인소장)

'그림 속의 그림'이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화면 왼쪽 아래 콧수염을 한 화가는 붓을 들어 큰 캔버스를 인물들로 채워 나간다. '그림 속의 그림'에는 한 아이가 물고기와 장난을 치며 놀고 있고, 다른 한 아이는 화가의 붓에 의해 지금 막 동작을 완성해 가는 중이다.

 

 

 

 

묶인 사람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10 * 15 cm, 개인소장)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각각 손발이 묶인 채 웅크리고 꼬꾸라지고 나뒹굴고 있는 상태이다. 심지어 그림 속의 게들도 열 개의 발이 서로 묶여버려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오로지 화면 오른쪽 위의 한 아이만이 두 다리를 쫙 벌린 채 앉아있을 뿐이다.

 

 

 

 

신문을 보는 사람들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10.1 * 15 cm, MoMA 소장)

여러명의 인물들이 작은 화면에 꽉 들어차게 새겨져 있다. 오른쪽 위에는 신문을 돌리는 아이가 그려져 있고, 대부분의 어른들은 심각한 얼굴로 신문을 펼쳐 읽고 있다. 신문기사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의 암울한 정치적 현실을 담고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엽서화

 

이중섭은 일본 유학기 도쿄의 문화학원에서 후에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를 후배로 처음 만났다. 이중섭은 이 마사코에게 수많은 '그림엽서'를 보냈다. 한 면에는 가득 그림을 그리고 다른 면에는 오로지 주소만 적혀 있으며, 글은 전혀 없는 '무언의 엽서'들이다.

 

 

누운 여인  (1941, 종이에 펜, 채색, 9 * 14 cm, 개인소장)

 

 

 

 

연꽃  (1941, 종이에 펜, 9 * 14 cm, 개인소장)

 

 

 

 

편지화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그림을 곁들인 사랑스러운 편지들을 많이 보냈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54.11, 26.5 * 21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아들 태성에게 보낸 편지  (1953, 종이에 펜, 채색, 26.4 * 20.2 cm, 개인소장)

 

 

 

 

아들 태현에게 보낸 편지  (1953, 종이에 펜, 채색, 26.2 * 20.3 cm, 개인소장)

 

 

 

 

전시장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을 촬영하지 못하고, 도록에서 일부 사진을 스캔하고 해설의 일부를 옮겨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