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여행 스케줄은 바티칸시티 박물관과 성 피에트로 대성당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로마 시내를 관광하기로 되어있다.
바티칸 박물관은 평소에도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입장하는데 2~3시간은 뙤약볕에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아들은 한국인 현지 가이드에 예약을 하여 사전예약 입장을 할 수 있도록 사전조치를 해 두었다.
사전예약 그룹 입장에도 오전 8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그 뒤편에 줄서서 입장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된다.
바티칸시티는 로마시 안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가로 전체면적이 0.44km2 이지만, 전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이며 교황이 다스린다.
바티칸 박물관 입장 시에는 민소매, 반바지, 샌들 등의 복장과, 등산, 사진 가방 등 큰 배낭, 칼, 삼각대, 수저 등 뾰족한 물건을 가지고는 입장이 금지된다.
이탈리아와 바티칸시티의 국경선인 박물관 성벽의 정문 위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3대 화가 중에서 미켈란젤로(왼쪽)와 라파엘로(오른쪽)의 석상이 있다.
박물관 내에서도 두 거장의 작품이 대표적이고 관람객이 사실상 두 사람의 작품을 보러온다고 해도 좋을 만큼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30분 정도를 기다려서 입장을 했다. 검색대에서 위의 금지사항은 모두 통제되기 때문에 사전에 주의를 해야한다.
가이드가 대행을 했지만 여기서 입장권을 사고 개찰 기를 통과하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전시실과 솔방울 정원으로 갈 수 있다.
솔방울정원으로 나가 본다. 솔방울이 바티칸의 상징이라고 한다.
7년 전 여기를 들렀을 때는 공사 중이라 가림막을 쳤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볼 수가 있다. 좌우의 새는 중세 공작이라고 한다.
반대편에는 성 피에트로 대성당의 쿠풀라(돔)가 한눈에 시원히 들어온다.
가이드가 인솔 여행객들에게 30분에 걸쳐 미켈란젤로와 천지창조에 관해 집중 설명을 해준다.
아쉽게도 우리는 관람을 시작하자마자 이 가이드를 잃어버렸다.
부활절을 이틀 앞둔 시점이라 워낙 많은 관람객이 들어와 전시실을 꽉 메운 인파 속에서 아차 하는 순간에 잊어버리고 한참을 찾았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다.
가이드 찾는데 시간을 많이 빼앗긴 우리는 결국 자력으로 관람을 하기로 하고 라오콘 군상 등 조각품이 전시된 홀을 찾다가 결국 이것마저 포기했다.
7년 전에 봤으니까 덜 억울하다 자위하고, 군중에 떠밀려 '지도의 복도'를 따라가며 벽화들을 감상하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시간을 많이 할애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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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 때 예술품들을 싹쓸이 약탈해가서 주로 벽화 등 건물에 붙어있는 예술품만 남았다는데 과연 화려한 작품들이다.
오랜 시간 천장을 쳐다보느라 목과 어깨가 아파 창가에 서서 좀 쉬면서 내다보니 박물관 건물 가운데 주차장이 있다.
다음은 테마별 룸이 전개된다. 총 1,400개가 넘는 방이 있다는데 그 규모와 작품의 수만도 어마어마하다.
여기는 '서명의 방'이라 불리는 방인데 라파엘로의 방이라고도 하고 그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라파엘로(1483~1520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추앙받는 화가로 이 방에 전시된 <아테네 학당>이 그를 3대 거장의 반열에 올려준 작품이다.
라파엘로는 이 작품에서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유명인사의 초상으로 고대 인물을 형상화함으로써
당시 인물. 예술과 고대 철학이 지닌 연관성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림 가운데에서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사람은 당시 레오 날도 다빈치의 두상으로 고대 플라톤(BC428~348)을 형상화했고
(오른쪽은 아리스토텔레스를 형상화)
그림 앞부분에 머리를 팔에 고인채 대리석 탁자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한 헤라클레이토스(BC330~275)
(가운데 누워서 무엇을 읽고 있는 사람은 디오게네스)
그림 우측의 전면에 몸을 구부린 채 컴퍼스로 원을 그리며 기하학을 설명하는 사람은 건축가 브라만테를 모델로 한 유클리드(BC330~275)
화면 우측 가장자리에 흰 모자를 쓴 남자 뒤, 그림 밖 관람객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검은 모자 쓴 사람이 라파엘로 자신이다.
인류 최고의 석학들 초상화 사이에 자신의 얼굴을 슬쩍 끼워 넣어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했을까?
긴 방의 행렬이 끝나고 다음은 시스티나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추기경 모임인 콘클라베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바티칸 박물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가장 큰 목표는 이 예배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와 벽화 '최후의 심판'을 보는 것이다.
이 예배당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고 가이드의 설명 또한 금지되어 있다. 그저 눈과 머리로 조용히 감상만 하라는 뜻이다.
불친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음 백과에서 윤경민의 'ENJOY 이탈리아'에 실린 천지창조의 사진과 설명도를 빌려왔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조각가인 미켈란젤로(1475~1564년)는 24세의 약관에 성 피에트로 대성당의 돔과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을 조각한 "피에타"로
인기가 급상승하자 이를 시기한 교황청 사무장의 농간으로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려줄 것을 요청받는다.
그림은 처음인 미켈란젤로는 고민하다가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벽면에 회반죽을 바른 뒤에 그것이 마르기 전에 안료를 입혀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화법으로, 처음 그림을 그려보는 미켈란젤로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혼자서 4년(1508~1512)만에 구약성서의 창세기 전 과정을 천장에다 그려 넣었다.
약 25년이 흘러 환갑이 된 그에게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서쪽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6년의 작업 끝에 1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벽면에 온갖 인간의 형상을 망라한 391명의 육체의 군상이 드러났다.
사진과 설명문은 역시 다음 백과에서 윤경민의 'ENJOY 이탈리아'에 실린 최후의 심판의 사진과 설명도를 빌려왔다.
미켈란젤로 (1475~1564)
많은 시간을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보내며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우리는 박물관을 나왔다.
바티칸은 스위스 근위병이 지키고 있었다. 이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청의 유일한 군대조직으로 15세기부터 이어온다
스위스 용병인 이들은 전쟁 중에도 줄기차게 교황청과 교황의 안위를 지켜냈기 때문에 지금까지 변함없는 신임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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