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영(鎭武營)은 조선 시대에 해상 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軍營)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병인양요(1866년)를 촉발시킨 서울 애오개('아현'의 옛 지명) 회장 최인서 요한,
장주기 성인의 조카 장치선, 박순집의 형 박서방, 조서방 등이 이곳 진무영에서 순교하였다.
진무영은 1700년(숙종 26년) 강화부에 그 본영을 설치하고,
1779년(정조 3년) 통어영을 병합하였다가 1789년(정조 13년) 다시 분리하였다.
특히 1866년의 병인양요 이후, 외국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여 쇄국 정책을 쓴 당시로서는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국방상 중요한 군영이었다.
강화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하지만 육로의 경비와 기찰이 심해지자 해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외세와 충돌의 현장이었기에 박해 또한 극심하였다.
진무영 성지는 강화읍 고려궁지 바로 아래(강화초교 정문 맞은 편) 강화 성당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많은 순례객들이 찾고 있다.
(한국천주교성지순례/한국천주교주교회의)
병인양요와 강화도
1866년(고종 3년)초, 고종의 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자, 조선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많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병인박해).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 침입한 사건을 병인양요라 한다. 병인박해 때 화를 면한 리델 신부는 장치선을 비롯한 여러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으로 충청도에서 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박해 소식을 전하면서 조선에 대한 보복원정을 촉구한다.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은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9월)는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수도 서울까지의 뱃길을 살피기 위한 예비적 탐사원정이었고, 2차(10월)는 수십 일 간 강화도를 점령, 정족산성 전투까지 벌이는 등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복 차원의 무력원정이었다.
프랑스 함대의 1.2차 조선원정길에는 리델 신부가 통역으로, 조선인 천주교 신자 최인서,최선일,심순여, 등 3명이 물길 안내인으로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리델 신부가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할 때 그를 따라 나섰던 사람들었다. 리델은 강화도 땅에 제일 먼저 발을 디딘 천주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해 11월,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이 퇴각할 때 그들의 배에는 조선인 천주교 신자 10명이 타고 있었다. 위의 물길 안내인 3명과 프랑스 군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있을 때 리델 신부를 찾아 온 김영이, 그리고 작약도에 배가 잠시 머무르고 있을 때 조선 내의 천주교 박해상황을 리델 신부께 알리러 온 신자 장치선,송운오,이성의,이성집,박복여,김계쇠 등 6명이었다.
중국 상해에 도착한 19명의 천주교 신자 중, 최인서,장치선,김계쇠 등은 이듬해(1867년) 4월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1년뒤, 장치선과 최인서는 강화 진무영에서 순교한다.
(강화 성당 홈페이지에서 옮김)
인천교구 강화 그리스도왕 성당(강화 성당)의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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