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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성지순례/수원교구

<국내성지032> 북수동성당과 수원화성 전역, 수원순교성지 181124

수원 성지는 정조 대왕의 정치 무대로 다산 정약용(사도 요한)이 설계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수원 화성 전역이다.

수원 화성에서 박해 시대 동안 무명 순교자를 비롯한 2천여 명 이상이 순교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순교터는 

토포청, 이아, 화성행궁, 간이옥, 종로 사거리, 형옥, 동남각루, 팔달문 밖 장터, 장안문 밖 장터, 동북포루, 

동암문, 남암문, 북암문, 사형터, 화서문, 매향다리 서남쪽, 동북포루, 동장대, 용주사 포교당 자리 등 총 19군데에 이르며 

매월 첫 금요일 밤에 달빛 순례가 진행된다.

 

조선 후기 하느님의 종 순교자 원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17위와, 근.현대 하느님의 종 순교자 심 폴리 신부를 비롯한 3위,

이렇게 총 20위 하느님의 종 수원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하여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현양 기도회 미사가 봉헌된다.

 

일제 강점기에 심 폴리 신부가 건립한 수원 최초의 고딕식 성당인 구 수원 성당 복원과 함께 

수원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 자리인 뽈리 화랑을 등록 문화재로 등재하여 교육, 문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성지 마당의 로사리오 길 화단에는 순교자들이 교수형을 당한 미루나무와 

성모님과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야생화와 야생초들이 자라고 있다.

 

(한국천주교성지순례/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오늘 수도권에 첫눈이 내렸다.

5cm의 많은 눈이 내려 성지순례에 덤으로 멋진 설경을 기대하고 수원으로 갔으나 

북수동 성당에 도착하니 눈은 그치고 내린 눈도 다 녹아버렸다.

 

 

 

 

조선 시대 정조의 승하 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을 시작되었는데

특히 수원에서 심하게 진행된 곳이 바로 수원화성의 중심에 위치한 북수동 성당 일대에서 자행되었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형이 집행되었던 토포청(중영)과 심문을 하던 이아(화청관)이 있던 가슴 아픈 역사가 남아있는 곳이다.

 

 

 

 

 

 

심응영 뽈리 데시데라도 신부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서 1907년에 입국하여 43년간 한국에서 사목하였다.

한국어를 한국사람보다 더 잘하고, 언제나 검정 고무신을 신던 그는 1950년 9월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66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수원순교자 현양비

현양비의 12개의 버려진 기차 침목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었던 수원순교자들을 상징한다.

 

 

 

십자가의 길과 순교자들이 교수형 당한 미루나무와 돌형구

 

 

 

 

 

 

수원화성의 순교지를 네 코스로 나누어 신부님 인솔하에 매월 첫 금요일 밤에 달빛 순례가 진행된다.

성모자상 앞에서 로사리오 기도를 바친 후 출발한다.

 

 

 

 

네 코스를 하루에 다 순례하기는 무리이므로 하루에 다 돌아보기 위해 

수원화성 성곽을따라 한 바퀴 돌며 주요 순교터만 찾아보기로 했다.

 

팔부자터

 

성모상 앞에 바라다 보이는 로사리오화단과 북쪽편 일대가 옜 팔부자터이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건립하면서 자본과 물류,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위해 전국 8도의 부자 한집씩 수원화성 안에 유치한 팔도 부자들의 집터이다.

여기서 로사리오 사도신경을 바치고 순례를 시작한다.

 

 

 

화홍문(아름다운 무지개 문, 북수문, 7개 수문)

 

옛날에는 매년 폭우로 수해를 겪었지만 화홍문을 건립한 이후 수원에 홍수가 사라졌다고 한다.

무지개는 구약의 노아의 홍수이후 하느님께서 맺으신 새계약을 상징하며 화홍문은 신약의 칠성사와 성령칠은을 상징한다.

화홍문은(북수문)은 수문이 7개이지만, 화홍문을 통과한 물이 흘러가는 남수문(남쪽의 수문)은 수문이 9개로 되어있는데,

이는 칠성사와 성령칠은을 물흐르듯 순리에 따라 공동의 유익을 위해 실천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는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방화수류정(동북각루)

 

방화수류정은 동북쪽의 모서리에 세워져 있다하여 동북각루라고도 부른다.

방화수류정은 기본형태의 정자에 'ㄴ'자 모양으로 서쪽편에 건물이 증축이 된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지붕 꼭대기가 십자가형태로 되어 있고, 천정 대들보 3군데가 십자가 형태이다.

당시 천주학을 서학이라고 하였는데, '그리스도는 서쪽에서 온다'는 뜻으로 서쪽벽에 십자가 상감문양 86개가 새겨져 있다.

맑은 날 해가 지고 어두워질 무렵에 아래에 있는 화홍문 쪽에서 올려다 보면 서벽의 십자가 문양이 번쩍번쩍 빛이 나는데,

이는 '십자가는 세상 어두움을 쫓는 광명이다.'라는 신앙적인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북암문(순교자들의 목을 걸어놓은 곳)

 

방화수류정에서 내려오다보면 왼쪽에 북암문을 만난다.

수원화성은 동서남북으로 대문 4개와 암문 5개 총 9개의 문으로 설계되어 있다.

 

수원화성에 오면 꼭 듣는 이야기가 있다.

'북쪽문(장안문)은 부서지고 남쪽문(팔달문)은 남아 있고, 서쪽문(화서문)은 서있고, 동쪽문(창룡문)은 도망갔다.'

625동난때 북쪽문(장안문)은 부서졌고, 동쪽문(창룡문)은 인민군들이 그곳에 폭탄과 무기를 숨겨두어 UN군이 전투기로 폭파하였다.

그 이후 창룡문은 <화성성역의 궤>라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재에 의해 복원되었다.

 

북암문은 북쪽의 숨겨진 문이라는 뜻이다. 암자는 숨을 암, 어두울 암자이다.

성 밖에서는 적군의 눈에 띄이지 않게 설계되어 있다.

문이 작아서 몸을 숙여야 드나들 수 있다해서 당시 양반들은 체통이 떨어진다하여 지나다니지 않았고,

따라서 암문은 주로 중인 이하 서민, 천민, 노비, 병사, 상인, 짐승들이 지나다니던 문이었다.

그래서 신분이 천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이곳 암문에 천주교인들의 목을 매달아 놓고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하였다.

 

 

 

 

용연

 

용연은 '왕의 연못'이라는 뜻인데, 북암문을 통과하여 성 바깥쪽으로 내려가면 방화수류정 아래쪽으로 다산이 설계한 인공 연못과 섬이 있다.

용지대월이라해서 옛부터 '어두운 밤 용연에 달이 비출 때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를 이룬다' 하였고,

가뭄때 수원 유수부 부사가 백성들과함께 이곳에 찾아와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다.

 

 

 

동북포루

 

용연에서 동편 언덕에 올려다보이는 동북포루는 'ㄷ'자 형태로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치성구조이다.

박해때에는 성 밖에 모여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동북포루의 창문을 열고 휘광이가 천주교인들 목을 치고 몸둥이는 성밖으로 내던졌고,

목은 서민들과 천민들이 드나드는 북암문에 걸어놓아 천주학을 믿지못하게 하였다.

 

 

 

 

성벽걷기

 

옛 사람들은 순성놀이라해서 성벽을 따라 걷는 풍습이 있었다.

성벽을 따라 걷노라면 다산의 천지인(하느님과 대자연과 인간의 상생과 조화와 소통)사상과 

외축내탁형(성벽바깥은 돌축대, 안쪽은 진흙을 채움)과 'ㄷ'자 형태로 설계된 치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창룡문(동문)

 

625동란때 폭파되었으나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재에 의해 복원되었다.

 

 

 

 

 

남수문

 

남수문은 북쪽의 북수문(화홍문)을 통과한 물이 흘러드는 남쪽의 수문이다.

그런데 북수문이나 남수문이나 강폭은 똑같은데 북수문은 수문이 7개, 남수문은 9개로 되어있다.

이는 7성사와 성령7은을 물흐르듯 순리에 따라 공동의 유익을 위해 실천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는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동남각루

 

동남각루는 동북포루와 마찬가지로 군사들이 경계를 서거나 휴식을 취하는 곳인데

자신의 몸을 드러내지 않고 각루의 창문에 자물쇄처럼 생긴 구멍으로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고 공격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박해시대에 형옥에 갇혀 있던 천주교인들이 포승줄에 묶여 남수문 통로를 지나 언덕 위의 동남각루 위로 끌려 올라갔고, 

동남각루의 창문을 다 열어놓고 목을 쳐서 몸은 성밖으로 던지고, 목은 남암문에 걸어 놓았다.

 

 

 

 

팔달문 밖 장터

 

팔달문은 수원화성의 남쪽에 있는 문으로, 이 문을 통해야만 사방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팔달문 옹성 앞 일대가 예전에 한 달에 여러번 장이 섰던 <팔달문 밖 장터>이다.

장이 서는 날이면 형옥에 같혀있던 천주교인들이 끌려나와 남자의 경우 4백대이상 맞고 이 자리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장터에 모여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순교자들은 포졸들에게 "나으리들, 저희 때문에 얼마나 팔이 아프십니까?"라고

오히려 그들을 걱정하고 감사해 하며 주님을 위해 용감히 순교하였다.

 

 

 

 

용주사 포교당

 

이곳은 본래 조계종 용주사의 포교당이었는데 최근에 수원사로 개칭되었다.

여기서도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처형된 순교터이다.

 

 

매향다리 서남쪽

 

이 곳은 매화나무 향기가 그윽했던 매향다리이다.

이 앞의 매향통닭집을 포함해서 매향다리 서남쪽 일대가 박해시대에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참수된 순교지이다.

 

 

 

장안문 밖 장터

 

장안문은 정조가 부친을 참배하기 위해 한성과 수원을 오가며 통과한 문(북문)으로 

4대문 가운데서도 가장 웅장하고 문의 양쪽 옆으로는 포를 설치한 적대가 설치되어 있다.

성바깥의 북쪽편이 한달에 여러차례 장이섰던 장안문 밖 장터이다.

이곳 장터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주교신자들을 매질하여 처형한 장살형이 집행되었다.

 

 

 

 

화서문(서문)

 

수원화성의 남과 북을 잇는 종선 길은 정조대왕의 능행차길로 활성화가 잘 된 반면에

동과 서를 잇는 횡선으로는 인적이 드물고 거의 발전이 되지 못하였다.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사형터에서 처형된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화서문을 통해 자주 밖으로 나가게 되자

 사람들은 화서문을 시체가 나가는 구멍이라해서 일명 시구문이라고 불렀다.

 

 

 

 

 

 

 

사형터

 

제일감리교회 건물앞 주차장 터는 수원유수부의 사형터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일반 중범죄 사형수들을 처형한 곳인데, 사학죄인으로 몰린 천주교인들이 무수히 잡혀들어와 처형되었다.

이곳에서 처형된 이들은 대부분 이름도 없이 숨져간 무명순교자들이다.

 

 

종로사거리(여민각)

 

박해시대에 행인들의 발길이 가장 많았던 이곳 종로거리에서는 대낮에 이 종을 쳐서 군중을 모으고 

토포청에 갇혀있던 천주교인들을 끌어내어 참수형으로 공개처형하여 백성들이 천주학을 믿지 못하게 하였다. 

 

 

이아(貳衙 : 화청관) 터

 

이아란 수원유수부사 다음으로 두 번째 높은 관직의 판관이 집무를 보던 관아라는 뜻이며,

또한 외부 사신들을 접견한 곳이라해서 화청관이라고도 하였다.

토포청에 연행된 신자들 가운데 중인이하 천민들을 이곳에서 심문하였고

힘없고 배운것 없고 가진것 없는 서민 천주교인들은 고문을 받는 도중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간이형옥터

 

화성행궁 광장 북서쪽에 있던 간이형옥터이다.

이곳은 화성행궁에서 심문을 받던 양반신자들이 처형되기 전까지 수감되어있던 곳이다.

처형날이 되면 오전에 양반신자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했고, 오후에 처형했다고 전해진다.

 

 

화성행궁 신풍루 앞 공터

 

토포청에 연행된 이들 중 양반천주교인들만 따로 심문한 곳이다.

 

 

토포청(중영)

 

한양에는 포도청, 지방에는 토포청이 있었는데, 

수원유수부 토포청은 옛 수원군청 터에서부터 수원성지 대성당에 이르는 넓은 장소였다.

토포청은 천주교인들을 미루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과

창호지를 얼굴에 붙여 질식사시키는 도모지형(백지사형)과

온갖 고문과함께 매질로 죽이는 물고형을 집행했던 박해현장이다.

 

 

 

정조의 정치무대였던 수원화성은 '무당짓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천주학쟁이만은 되지 말아라'는 말이 오늘날까지 내려올 정도이다.

정조 사후 서학에 관대했던 정조에 대해서 정조를 반대하는 정적들에 의해 

정치적 보복 형식으로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전국적으로 가장 극심하였다.

 

수원순교자 현양비 앞에서 마무리 기도를 드린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