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주교성지순례/의정부교구

<국내성지034>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181201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리었으며, 16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천주교의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하였고, 그 후 활짝 열려 있던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고난과 박해만이 기다리는 신앙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다 마침내 1801년에 순교하였다.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를 갔고, 외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남겨져 선종하였다.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상황과 대비책을 적어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고 준비했던 '백서'는 젊은 학자의 용기있는 표현이며,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이다.

 

황사영의 세례명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와 달레의 한국 교회사에서 '알렉산델'로 알려졌으나

1990년대 교회사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알렉시오'임이 밝혀졌다.

황사영의 묘는 180년 동안 찾지 못하다가 1980년 후손들과 학자들에 의해 현재의 묘가 발견되었고, 묘역이 조성되었다.

황사영 순교자의 묘역은 경기도의 도로 신설 계획에 따라 이장 또는 현 지역에서의 성역화 작업이 결정될 예정이다.

 

(한국천주교성지순례/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는 찾기가 어렵다. 아차하면 지나쳐 버린다.

네비게이션에 '황사영의 묘'나 '양주 썬모텔'을 치고 아래 사진의 썬모텔을 먼저 찾는다.

그다음 모텔 옆에 서 있는 안내 간판이나 '요양원 급식전문'이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을 찾아 그 건물 앞에 주차한다.

 

 

 

 

요양원 급식전문 건물과 오른쪽 향나무 사이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 안내판과 함께 스탬프 찍는 곳이 있다.

 

 

 

 

본관은 창원. 세례명은 알렉시오(Alexius). 자는 덕소(德紹). 아버지는 한림학사 석범(錫範)이다. 정약종(丁若鍾)에게 사사했다.

1790년(정조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정약종의 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하고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을 계기로 일어난 신해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지켰으며 관직 진출을 단념했다.

1795년 숨어서 전도하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만나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남송로(南松老)·최태산(崔太山)·손인원(孫仁遠)·조신행(趙信行)·이재신(李在信) 등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전교활동을 벌였다. 1796년에는 이승훈(李承薰)·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주문모와 협의하여 베이징(北京)에 서양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기도 했다. 1798년 경기도 고양에서 서울 애오개(阿峴洞)로 이사하여 신도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계속 전도활동을 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은거했다. 그곳으로 찾아온 황심(黃沁)과 상의한 끝에 베이징 주교에게 박해의 전말을 알리고 조선교회 재건책을 제시하는 백서(帛書)를 작성하여 옥천희(玉千禧)를 통해 중국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발각되어 같은 해 9월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1998년 천주교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시복 시성 통합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어, 교황청에 제출한 '하느님의 종' 125위의 시복 청원서에 순교자로서 포함되었다. 그러나 '백서'의 역사적 의의를 둘러싼 논란으로 인해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시복 미사에서는 제외되었다.

 

(자료출처 / 다음백과)

 

 

 

 

 

연락처 : 순교자 공경 위원회 031-850-1497

관할성당 : 송추 성당 031-855-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