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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서울특별시

<조선왕릉> 왕조의 흥망성쇄, 서울 헌릉과 인릉(2) 200918

오늘은 서울 서초구 대모산 근처에서 볼 일을 마치고 내곡동의 서울 헌릉과 인릉을 둘러본다.

헌릉은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재위 1400~1418년)의 능이고, 인릉은 제23대 임금 순조(재위 1800~1834년)의 능이다.

400년이라는 시차와 재임 중의 업적이 뚜렷이 상반되는 두 사람의 무덤이 같은 공간에 있어 그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다.

 

 

 

태종은 조선왕조 건국 시조인 태조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로 아버지를 도와 건국에 가장 공로가 크지만, 신권 강화를 도모하는 정도전과의 권력 쟁탈전에서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승리하여 제3대 태종으로 왕좌에 앉는다.

태종은 강력한 통치로 왕권을 튼튼하게 하고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 놓는다. 거기서 더 나아가 후세까지도 외척 세력에 의한 왕권의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처남인 민무구 등 민 씨 형제들을 사사하고, 이숙번 등 공신들도 축출했으며, 아들 세종의 장인인 심온까지 사사하여 세종대왕의 치적을 가능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태종이 왕권이 최고로 강력한 태평성대를 이룩한 왕인 반면, 순조는 그 반대로 신하들의 당파 싸움과 세도정치의 틈바구니에서 어린 나이에 임금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였고, 이 때부터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4대 후인 27대 순종을 끝으로 왕조가 멸망했다. 

오늘 헌인릉 답사에서는 가장 전성시대 왕과 망해가는 시대의 왕의 무덤에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찾아보고자 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인릉의 홍살문이다.

 

 

인릉(仁陵)은 조선 제23대 순조(純祖 : 1790~1934, 재위 1800~1834)와 순원황후 김씨(1789~1857)의 합장능이다.

순조는 정조와 유비 박씨의 아들로 1800년 11세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였다. 5년 후 정순왕후가 돌아가자 직접 정사를 돌보았으나 안동 김 씨 세도정치에 휘둘려 국정이 어지러워지고, 부정부패가 난무하고, 가뭄 등 자연 재난, 홍경래의 난 등 도둑이 창궐하여 국력은 기울어져 갔다.

순원황후는 1802년(순조 2)에 왕비가 되었다. 순조가 죽자 헌종과 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수렴청정을 하여, 조선의 왕비 중 유일하게 2번 수렴청정을 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각각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로 추존되었다.

인릉은 처음 파주 장릉(인조와 인열왕후) 근처에 있었다가, 1856년(철종 7)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배위와 향로.어로는 잘 갖추어져 있는데 수라간과 수복방이 없다. 능역 전체가 좁고 작은 느낌이다.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신이 오르내리는 신도

 

 

산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진설하는 산신석

 

 

제사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

 

 

능역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쳐 놓는 붉은색 진입금지 목책이 여기는 없다.

 

 

비각이다. 비각 안에는 황제로 추존 전 비석과 추존 후 비석 두 개의 비석이 있다.

 

 

왼쪽 비탈로 해서 능침공간으로 올라가 본다.

 

 

국조오례의에 따른 평범한 능침이다. 두 분의 합장이므로 봉분은 하나이고, 봉분의 크기는 작아 보이는 느낌이다.

장명등 1, 혼유석 1, 망주석 2, 문인석 2, 무인석 2, 석호 4, 석양 6, 난간석 1조, 병풍석은 없다.

전체적으로 갖추어야 할 석물의 숫자는 갖추었지만 크기가 작고 문양 등이 초라하다는 느낌이 든다.

 

 

능침을 내려와 오른쪽에 있는 헌릉으로 간다.

 

 

헌릉(獻陵)은 조선 제3대 태종(太宗 : 1367~1422, 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 씨(1365~1420)의 쌍능이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째 아들로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1400년에 왕위에 오른 후 중앙과 지방의 제도를 정비하고,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을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태종 사이에 양녕, 효령, 세종, 성녕의 네 아들과 딸 넷을 두었다. 1420년(세종 2) 태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헌릉에 모셔졌다.

헌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 있고 문. 무인석이 각각 두 쌍이며,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5개인 것이 특징이다. 능 아래 신도비각에는 1424년(세종 6)에 세운 신도비(보물 제1804호)와 1695년(숙종 21)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여기는 비각을 공사중이다. 홍살문이 오른쪽으로 돌아가서 있다.

 

 

신성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다.

 

 

여기는 배위도 없고, 향로만 있고 어로도 없다. 수라간, 수복방도 없다.

 

 

정자각 너머로 두 개의 봉분이 늠름하다.

 

 

여기도 능침 출입 금지 목책이 없다. 조선왕조 초기 능인데도 많은 것이 생략됐다.

 

 

비각을 공사 중이어서 비각 안의 보물 제1804호로 지정된 신도비를 보지 못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서 숙종 때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한다.

 

 

오른쪽에 있는 산책로를 따라가면 헌릉 입구로 간다.

 

 

빨간색 현 위치라 된 곳에서 계단을 오르면 헌릉 능침 옆으로 가서 능침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태종보다 원경왕후가 2년 먼저 죽고 2년 후에 태종이 같은 나이에 죽었는데, 합장을 하지 않고 봉분을 따로 했다. 당시의 풍속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태종이 민비의 친정 동생들을 다 죽이고, 그로 인해 친정아버지도 울화병으로 죽어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자 민비와 태종의 관계가 원수지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인들이 무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들 세종이 썼으니까 합장은 아니지만 나란히 의좋게 보인다.

앞에서 봐서 왼쪽 봉분이 태종 능이고 오른쪽 봉분이 원경왕후 능이다. 소위 남좌여우다.

 

 

헌릉은 태조의 건원릉 보다도 규모가 크고 화려하며 모든 석물의 숫자가 2배로 배치돼 있다. 능침 공간도 상계, 중계, 하계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혼유석도 두 개이고

 

 

장명등도 두 개

 

 

문인석도 두 개씩 두 쌍이고

 

 

무인석도 두 개씩 두 쌍이다.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고 그 바깥으로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과 난간석의 문양들도 화려하다.

 

 

석호와 석마, 석양들도 숫자가 두 배이고 크기도 크다.

 

 

헌릉과 인릉은 능침 공간이 봉분의 크기에서부터 모든 석물의 숫자와 크기, 조각의 정밀함과 화려함이 차이가 있다.

헌릉이 조성되어 있는 곳에 인릉이 나중에 만들어진 탓이겠지만, 전체 능역 면적도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릉은 헌릉의 문간방 같은 느낌을 준다. 

답사를 마치고 인릉 옆길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데 하늘의 구름과 왕릉의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