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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경기도

<조선왕릉>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김포 장릉(1) 210314

조선왕릉 탐방 다음은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인조의 아버지 추존 원종의 능인 김포 장릉으로 간다.

조선왕릉 중에 장릉으로 불리는 능이 세 곳이 있다. 한글로는 같은 장릉인데 한문으로는 모두가 각각 다른 이름이다.

영월 장릉(莊陵)(6대 단종), 파주 장릉(長陵)(16대 인조), 김포 장릉(章陵)(추존 원종)이 그것이다

 

 

 

원종(元宗 1580-1619)은 제14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추존되기 전의 군호는 정원 군이다. 첫째 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1632년(인조 10) 왕으로 추존됐다. 어렸을 때부터 용모가 빼어나고 태도가 신중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아버지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피난길에 올라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590년(선조 23) 정원군(원종)과 가례를 올리고 연주 군부인에 봉해졌다. 1632년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봉 되었다.

 

 

 

매표소를 통과하면 같은 건물에 장릉 역사문화관이 있다. 지금은 코로나 방역의 일환으로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바로 1km 거리의 관람로를 따라 능역으로 간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재실이다.

 

 

재실에서 능으로 가는 길에는 연지가 있다. 연지에는 연꽃도 많고 조선왕릉 연지 중 가장 아름다운 연지인 것 같다.

 

 

연지가 끝나는 곳에 금천교가 있다. 홍살문을 지나 계단식 향로를 올라가면 언덕에 정자각과 능침이 있다.

 

 

"전하, 새문동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있다고 하옵니다."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늘 왕위를 위협받는다고 여겼다. 그러던 차에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은 뜬소문일지라도 쉽사리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더욱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은 성품이 호탕하고 인물이 훤칠하며 무예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 등이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상소까지 올라온 상황이었으니, 광해군은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능창군을 강화도로 유배하고 왕기가 서려 있다는 정원군의 집은 몰수하여 자신의 궁궐(경희궁)을 지었다. 1615년(광해군일기 7)의 일이다.

 

 

강화도로 유배된 아들이 목숨을 잃고, 집까지 뺏기게 되는 비극 앞에서도 어쩔 수 없었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원군, 원종이다. 한때 그는 선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아들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부왕 선조를 모시고 떠난 피난길에서의 일화는 원종의 사려 깊은 면모와 그런 원종을 아꼈던 선조의 마음을 보여준다. 전란의 한가운데, 험난한 피난길에서 선조는 정원군에게 영변으로 가 왜적을 피하도록 당부했다. 이때 정원군이 영변에 이르러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살기 위함이 아니고 부왕의 명령 때문이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는가?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를 전해 들은 선조는 정원군의 마음을 가상히 여겨 다시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고, 정원군은 그 이후로 전란이 끝날 때까지 선조를 보필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종결되자 선조는 정원군을 호성공신에 봉했다. (선조실록 37년 6월 25일)

 

 

그러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선조는 이제 무덤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살 곳마저 빼앗겼으나 정원군의 심정을 알아줄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광해군이 또 무슨 죄목을 들어 나머지 아들들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원군의 삶은 하루하루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날들이었다. 결국 정원군은 걱정과 불안의 나날을 가까스로 버티다가 40세 한창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623년(인조 1), 동생과 아버지의 애통한 죽음을 기억하는 정원군의 맏아들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의 제16대 임금 인조다. 정원군 집터에 서린 왕의 기운이 능양군을 가리켰다는 것을 광해군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올라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일은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정원군은 왕으로 추존되고 원종이라는 묘호를 얻게 된다. 또한 그의 무덤은 흥경원에서 '장릉'으로 격상될 수 있었다. 인조반정이 역사가에게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 몰라도 적어도 정원군에게는 피 맺힌 원한을 푸는 순간이 되었다.

 

 

판위

 

경사진 지형에 따라 향. 어로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정자각과 제향 시설이다.

 

 

정자각에서 본 앞뒷면의 모습이다.

 

수복방
신로

 

능침 공간

 

 

봉분에는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없고, 대신 호석(흙이 흘러내려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능 주변을 감싼 석물)을 둘렀다.

 

 

비각 안의 비석에는 '조선국 원종대왕 장릉 인헌왕후 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
비석

 

비각 옆에는 인헌왕후 육경원 당시의 비석 받침돌이 남아 있다.

 

육경원 비석 받침돌

 

수복방

 

예감

 

산신석

 

홍살문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왕릉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연지를 지나 재실 앞을 거쳐 주차장으로 나온다.

 

 

 

주소 : 경기도 김포시 장릉로 79(풍무동 666-3)

전화번호 : 031-984-2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