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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이야기/경기도

<조선왕릉> 파주 삼릉(3), 공릉 순릉 영릉 210518

오늘은 공릉과 순릉 그리고 영릉이 있는 경기도 파주의 파주 삼릉을 찾았다.

1462년(세조 8)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가 왕세자빈 신분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세자빈 묘를 조성하였고, 1470년(성종 1)에 공릉으로 높였다. 이후 1474년(성종 5)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의 순릉이 조성되었다. 영조 대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가 1729년(영조 5)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세자 묘를 조성하였고, 1776년(정조 1)에 진종으로 추존하고 영릉으로 격을 높였다.

공릉의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셋째 딸, 순릉의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네째 딸로서 자매간이나, 시집으로 보면 장순왕후는 8대 예종의 왕비이고 공혜왕후는 9대 성종의 왕비로서 고부간이 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꽤 넓은 주차장을 마련하고 환경도 깨끗하다.

 

 

주차비도 무료이고 65세 이상 노인들은 입장료도 무료이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표소를 통과한다.

 

 

역사문화관이 있지만 코로나 때문에 폐쇄되었다.

 

 

진입로 양쪽으로 계수나무숲이 울창하다. 잎이 완전한 하트 모양인 것이 계수나무의 특징이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재실이 있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기본적인 재실의 구성은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그 외 부속 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를 따라 직진하면 공릉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영릉과 순릉이 있다.

 

 

순서에 따라 먼저 공릉으로 간다.

 

 

잘 가꾸어진 숲이 울창하고,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마시기 위해 사람이 없을 때는 마스크를 벗고 심호흡을 한다.

 

 

드디어 공릉 어귀에 도착했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 공릉이다.

 

 

공릉(恭陵)은 조선 제8대 임금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의 능이다.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1461)는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셋째 딸로 1460년(세조 6)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원손(인성 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 즉위 후 1470년(성종1)에 장순왕후로 추존하고, 무덤도 세자빈 묘에서 공릉으로 승격되었다.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배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 수라간, 수복방, 예감, 산신석이 전부 제자리에 갖추어져 있다.

다만 지형상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향로와 어로가 직각으로 꺾어져 있음이 여느 왕릉과 다른 점이다.

 

홍살문
직각으로 꺾인 향.어로, 앞은 배위
정자각
향로 계단의 무늬가 아름답고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신이 정자각을 오가는 신로

 

왕릉의 뒷면으로 올라가 본다. 곡장, 혼유석, 장명등, 문인석, 석양, 석호는 갖추어져 있으나,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고 망주석과 무인석도 없다. 아마도 세자빈 묘였을 때 조성했던 조형물을 그대로 두고 능이 갖추어야 할 조형물을 더 추가하지 않은 듯하다.

 

 

비각 안에는 '조선국 장순왕후 공릉'이라고 새긴 표석이 있다.

 

 

수복방의 모습이다. 능참봉이 근무하는 공간이라 난방을 위한 굴뚝도 보인다.

 

 

재실에서 마련한 제사음식을 진설하기전 준비를 하는 공간이다.

 

수라간

 

공릉의 이모저모를 카메라에 담아본다.

 

 

발걸음을 돌려 순릉으로 간다. 숲이 너무 울창하여 어두움마저 느낀다. 가을 단풍 구경도 명소가 될 것 같다.

 

 

속세와 성역의 경계선을 표시하는 금천교를 지나 순릉에 도착한다.

 

 

순릉(順陵)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능이다.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는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넷째 딸로 1467년(세조 13) 자을산군(성종)과 가례를 올려 천안 군부인이 되었다. 성종 즉위 후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1474년(성종 5) 19세로 세상을 떠났다.

 

 

향로와 어로는 정자각과 일직선을 이루는데, 향.어로의 폭이 좁고 향로와 어로의 구분이 잘 안된다.

 

배위 또는 판위라고 부른데, 제관이 여기서 신에게 왕림하였음을 고하는 곳이다.

 

 

정자각 위에서 홍살문 쪽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정자각 앞면의 처마가 다른 곳과 차이가 있는듯하다. 다른 곳에서는 약간 둥그스름한 장방형이었다고 기억되는데, 파주 삼릉에서는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신령이 정자각에 왕림할 때 건너다니는 신로이다.

 

예감의 모양이 특이하다. 하얀 부분을 들면  그 아래 공간이 있어서 거기다 축문 태운 재를 버린다.

 

능침 공간이다. 공혜왕후가 죽었을 때의 신분이 왕후였기 때문에 국조오례의에 따라 왕릉의 예로 각종 조형물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파주 삼릉에서는 유일하게 왕릉 규범을 갖춘 왕릉이다. 올라가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비각 안에 있는 표석에는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수복방과 수라간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다.

 

수복방
수복방 굴뚝
수라간

 

 

순릉을 나와서 영릉으로 간다. 신록이 뿜는 피톤치드가 폐 깊숙이 파고 들어 26도의 더운 날씨에도 시원함을 느낀다.

 

 

영릉에 도착한다. 이 다리가 금천교인가 보다. 너무 현대식 다리여서 금천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영릉(永陵)은 추존 진종과 효순소황후의 능으로 쌍릉이다.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1719~1728)는 제21대 영조와 정빈 이 씨의 첫째 아들로 1725년(영조 1)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 1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장세자(孝章世子)라 하였다. 1776년(영조 52) 영조는 세손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였고, 영조가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 1715~1751)는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딸로 1727년(영조 3)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751년(영조 27)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가 즉위한 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었다.

진종과 효순왕후는 1908년(융희 2)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로 추존되었다.

 

홍살문
향로와 어로, 오른쪽은 배위(판위라고도 함)

 

정자각

 

능침 공간은 여전히 출입금지 구역이다. 쌍릉의 모습이 분명하다. 앞에서 볼 때 왼쪽 봉분이 진종이고, 오른쪽이 효순소황후의 봉분이다.

 

 

경계울타리 안쪽에 있는 사각형 조형물이 축문을 태우는 예감이고, 능침 공간 아래 바위가 산신석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영릉에는 수복방과 수라간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영릉에는 비각이 두 개가 있다. 진종이 왕으로 추존되기 전의 표석과 왕으로 추존 후의 표석, 그리고 황제로 추존된 후의 표석, 세 개의 표석을 수용하기 위해서 두 개의 비각을 세웠다.

 

 

이 비각에 왕으로 추존되기 전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에는 '조선국 효장세자 묘 효순 현빈 부좌'라 되어있다.

 

 

이 비각에는 추존된 후의 표석이 들어있다. 왼쪽에 있는 표석에 '조선국 진종 대왕 영릉 효순왕후 부좌'라고 되어있다.

오른쪽 표석에는 '대한 진종소황제 영릉 효순소황후 부좌'라고 쓰여 있다.

 

 

영릉의 아름다움을 찾아 카메라에 담아본다.

 

 

이로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중 39기를 답사 완료했다. 미답사 왕릉은 고양 서삼릉 내의 효릉인데, 이 효릉이 서삼릉 소유가 아닌 젖소개량사업소 부지 경내에 있어서 이를 답사하기 위해서는 젖소개량사업소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데, 정식 문서로 허가 신청을 했으나, 지금은 코로나 방역을 위해 무기한 불허한다고 한다. 하루빨리 코로나 19의 진정으로 전 인류가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