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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누정/대구.경북

<한국누정206> 김천 방초정(芳草亭)(보물) 230502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83
건축시기 : 조선 선조(1625년경), 정조 12년(1788) 현 위치 이건
문화재지정 : 보물 제2047호(2019.12.30지정)
답사일자 : 2023년 5월 2일,  맑음
 
 
 
대부분의 정자들이 언덕 위나 물가 경치 좋은 곳에 있는데,김천 방초정(芳草亭)은 상원리 원터마을 초입에 마을의 수문장처럼 서있다. 원터마을은 조선 중종이래 연안이씨 일가가 터를 잡아 명맥을 이어온 연안이씨 집성촌이다.
방초정을 처음 지은 이는 연안이씨 11세손으로 부호군을 지낸 방초 이정복(芳草 李廷馥, 1575~1637)이다. 이정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선조25)에  40리 떨어진 하로마을의 화순최씨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아내를 처가에 남겨두고 혼자 본가로 돌아와 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선영이 있는 능지산 아래로 피신했다. 친정에 남아 있던 부인 최씨는 죽어도 시집에서 죽겠다며 여종 석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왔으나 왜구를 만나 쫒기게 되었고 정절을 지키기 위해 마을 앞 웅덩이에 몸을 던져 죽었다. 최씨를 따르던 여종 석이도 뒤따라 자결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정복은 부인을 그리워 하면서 그녀가 몸을 던진 웅덩이를 지금의 연못으로 정비한 후, 이곳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방초정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후일 사람들이 이 연못을 '최씨담'이라 부른다.
1689년에 이정복의 손자 이해(李垓)가 한 차례 고쳐 짓고, 1736년 큰 홍수로 떠내려가 없어졌다가 1788년 이정복의 5대손 이의조(李宜朝)가 현재 위치로 옮겨 지었다. 이 정자는 조상을 추모하고 학문을 강론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중앙에 온돌방을 두고 사방에 난간을 덧댄 마루를 낸 구조이다. 1층에는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고, 건물 왼쪽에 출입을 위한 계단이 있다. 호박돌과 같은 자연석을 층층이 쌓아 구들과 고래를 둔 온돌을 방 하층부에 만든 다음 굴뚝과 아궁이를 앞과 뒤에 각각 설치하여 난방을 할 수 있도록 함. 사면이 개방된 정자는 통상적으로 겨울에 이용 효율이 떨어지는 데 반해 계절의 변화와 기능의 요구에 맞추어 마루와 방을 통합하거나 분리하여 쓸 수 있도록 한 방초정의 가변적 구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방초정은 기둥 상부에 결구된 이익공 포작과 충량의 결구 및 가구형식 등 전체적인 건축수법이 대체로 조선 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1788년 정자가 중건될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한 채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의미에서 보물로 지정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많은 시인들이 정자에 올라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시가 건물 안에 걸려있다.
 

 

 
방초정 앞 최씨담은 그 안에 두 개의 섬이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 지당 중 방지쌍원도(方池雙圓島)의 전형을 오롯이 간직한 유일한 정원 유구로 마을과 감천 사이에 놓여 마을의 오수나 유출수를 재처리 여과하는 수질 정화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생태환경적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인조 10년에(1632)에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문은 1764년에 세웠으며 현재의 정려각은 1812년에 증축했다. 정려각내 '절부부호군이정복처 증 숙부인화순최씨지려'라는 정려문은 인조의 친필이다. 정려각 옆에는 최씨부인과 함께 자결한 여종 석이의 비각도 있다.
 

왼쪽이 최씨부인 정려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