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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국내성지046> 다블뤼 주교 유적지, 신리성지 181225 신리는 조선시대 천주교 수용 초기부터 형성된 교우촌으로 주민 400여 명이 모두 신자일 정도로 규모가 컸다. 신자들이 많았던 만큼 박해도 심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한 곳이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를 통해 마을 전체 신자가 순교하거나 피난할 정도였는데 인근에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가 이를 말해 준다. 신리는 박해를 겪는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도 하였다. 서해를 통해 들어오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착지였고,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머무르며 사목 활동을 한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 황석두 루카, 손자선 토마스가 신리에서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과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후일 성인이 되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 더보기
<국내성지045> 한국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진산성지 181214 진산 성지는 1791년 제사 문제로 촉발된 진산 사건(신해박해)으로 한국 최초로 순교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곳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회는 미신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던 제사를 금지하였고, 그 가르침을 따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실천 때문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들의 제사 거부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불효의 죄로 체포된 윤지충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형벌과 죽음을 각오하고 덕을 쌓는 것이 효성이 부족한 것입니까?"라고 항변 하였고, 천주교를 버리라는 말에, "만약 제가 높으신 하느님 아버지를 버린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와 그의 사촌 권상연은 전주에서 처형되어 참수로 치명한 .. 더보기
<국내성지044> 손선지 성인과 정문호 성인의 고향, 부여 홍산 지석리 181214 지석리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숲정이에서 순교한 손선지 베드로와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이다. 두 분은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어려서 입교한 손선지 성인은 열심한 신앙으로 16세 때 샤스탕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병인박해 때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정문호 성인은 천주교를 알게 되자 곧 입교했는데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조차 깊은 사랑을 받았다. 그 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대성동 신리골에서 손선지 성인과 함께 살았다. 두 성인은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는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을 간직하.. 더보기
<국내성지043> 서천지역 신앙선조들의 교우촌, 산막골(작은재) 181214 천방산 자락의 산막골은 서천지역 신앙 선조들의 교우촌들 가운데 하나이다. 1839년 기해박해 뒤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곳이다. 서천지역 순교자들 가운데 기록이 남아 있는 순교자들은 57명에 이른다. 여러 교우촌 가운데 산막골이 가장 컸다. 산막골은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페롱 신부가 1858년부터 거주하며 사목 활동을 한 곳이다. 그가 1858~1865년까지 보낸 서한들 가운데 산막골에서 보낸 편지가 6통 남아 있고, 조안노 신부가 1862년 11월 4일에 산막골에서 보낸 편지가 1통 전해진다. 또한 산막골은 황석두 루카 성인 일가가 충북 연풍에서 이주하여 병인박해 전까지 10여 년 동안 살던 곳이다. 이와 함께 천방산 기슭 광장(고갯마루,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 더보기
<국내성지042> 성모 신심이 시작된 곳, 수리치골성모성지 181213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숨어 살던 교우촌으로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조직된 뜻 깊은 장소이다. 한국 교회의 성모 신심이 시작된 곳이며, 공주 지방의 신앙 공동체 형성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교우촌이다. 중국 상해에서 첫 사제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0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신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1846년 뜻밖에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수리치골로 피신하였다. 그해 11월 2일 두 선교사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조선 교회가 박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다. 성모 성심회는 수리치골의 한 오두막집에서 몇 명의 신자들로 시작한 작은 단체였다. 하지만 .. 더보기
<국내성지041> 줄무덤 & 새터, 청양 다락골성지 181213 산골 마을 청양 다락골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최양업 신부의 할아버지 최인주가 모친 경성 이씨를 모시고 피난해 오면서 교우촌으로 거듭났다. 이곳에서 한국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와 그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탄생했으며, 무명 순교자들의 줄무덤이 있는 곳이다. 최경환은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고, 부인 이성례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서, 시복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다락골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곳이다. 서울에서 먼저 체포된 앵베르 주교가 교우들의 피해를 막고자 다락골에 피난해 있던 두 선교사에게 자.. 더보기
<국내성지040> 바닷가 모래밭 처형장, 오천 갈매못순교성지 181213 갈매못 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등 다섯 성인과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바닷가로 한국 교회의 순교사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곳이다. 신리(충남 당진시 합덕읍)에서 먼저 체포된 다블뤼 주교는 더 이상 많은 교우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자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에게 자수를 권고하였다. 이에 순명하여 두 선교사가 신리로 와서 자수하였고, 황석두 루카도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조선 왕실이 경사를 앞두고 있어 서울 인근에서 피를 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여 멀리 보령 갈매못으로 보내 처형하게 했다. 갈매못은 수군들이 주둔하는 군사 요충지였다. 세 선교사들과 황석두 루카가 갈매못으로 이송.. 더보기
<국내성지039> 조화서,조윤호 부자 성인의 교우촌, 신창 남방제 181212 남방제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며, 조윤호 요셉 성인이 태어난 곳이고 조화서 베드로 성인과 여러 순교자들이 사셨던 곳이다. 조윤호의 가문은 구교우 집안으로 본디 경기도 수원 도마지에 살았다. 할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순교하고, 할머니 권 율리아나가 선종하자 아버지 조화서는 남방제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1848년 조윤호를 낳았다. 조화서는 1850년 경부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로서 전국 각처에 숨어 있는 교우들을 순방하는 길에 함께 하였다. 조윤호는 1865년에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한 뒤 이듬해 이 루치아와 혼인하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1866년 12월 5일 밤 포졸들이 급습하여 조윤호와 아버지 조화서를 체포하였다. 이들은 전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