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전원주택 집들이에 참석했던 일행들은 다음날 전원주택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명성왕후 생가를 관광하러 갔다.
관람 순서에 따라 우선 명성황후기념관부터 들렀다.
입구에 전시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어진이다.
명성황후는 고종 3년 2월 25일 창덕궁 중희당에서 초간택 심사를 받고, 3월 6일 삼간택에서 왕비로 선택되었으며,
별궁으로는 운현궁의 노락당을 배정 받아 50일 동안의 가례준비를 하며 궁중법도를 익혔다.
명성황후의 가례식 장면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낭인에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장면 상상도
일본 낭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할때 사용했던 칼의 복제품
시해 2년 후에 치러진 명성황후의 국장 장면
명성황후와 관련된 공연. 행사 등을 개최하는 문예관이다.
다음은 명성황후 생가로 간다.
이 집은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살까지 살던 집이다.
1687(숙종 13년)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안채만 남아 있던 것을 1996년에 안채를 수리하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을 지어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대문과 행랑채
사랑채와 중문
후원으로 들어가는 문과 후원
안채
주로 부인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주택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몸채, 내당 등으로 불리며 안방, 대청, 건넌방, 부엌 등으로 구분된다.
별당으로 들어가는 문
별당은 몸채의 겉이나 뒤에 따로 지은 집으로 주택에 부속된 별당은 주택내에서 사랑채의 연장으로 쓰여지거나, 자녀나 노모의 거처로 쓰여졌다.
명성황후는 1851년 11월 17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한창부부인 한산이씨이며, 명성황후가 8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영천군수 벼슬을 끝으로 서울 감고당에서 사망했으니 8세 이전에 이곳에서 글공부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여주를 떠나 서울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랑채로 나가는 문
대문 밖에서 본 별당 모습
명성황후 탄강구리비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명성황후의 고향집에 세운비를 말한다.
다음은 민속마을로 간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음료수라도 마시라고 마련된 곳이다.
마지막으로 감고당으로 간다.
감고당은 명성황후가 8살 때 여주의 생가에서 서울로 이사와서부터 왕비로 책봉된 16살까지 8년간을 살았던 집이다.
사랑채
중문채
안채
옆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와서 바라본 사랑채와 안채의 모습이다.
명성황후의 친정 아버지 민치록이 늦도록 자식이 없어 부인과 함께 자식을 빌던 소원바위이다.
53세의 늦은 나이에 딸을 얻으니 그녀가 후일의 명성황후이다.
'국내이야기 > 경기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오라비난초, 국립수목원 190808 (0) | 2019.08.09 |
---|---|
연꽃, 관곡지연꽃테마파크 190718 (0) | 2019.07.20 |
어떤 집들이, 여주 전원주택 190706 (0) | 2019.07.10 |
연꽃과 개개비, 이천 성호호수연꽃단지 190704 (0) | 2019.07.05 |
능소화, 분당서울대학교병원 190702 (0) | 2019.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