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주교성지순례

<국내성지173> 겟세마니 피정의 집(신앙의 증인 조선희 필립보 신부) 220519 강원 인제군 소양강 변에 위치한 겟세마니 피정의 집은, 1991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소속 선교사 조선희 필립보(Philip J. Crosbie) 신부가 설립하였다. 조선희 신부는 1915년 호주에서 태어나 1939년 수품 후, 1940년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58년 동안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해방 전 이미 일제에 의하여 강제 구금과 추방을 경험했던 조 신부는, 홍천 본당 주임 신부로 재직하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교우들과 성당을 지키다가 공산군에게 피랍되었다. '죽음의 행진'과 3년간의 포로 생활을 통해 수많은 순교자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조 신부는, 주님의 은총으로 생환하여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변함없이 선교사로 신앙을 전하며 일생을 온전히.. 더보기
<아름다운성당> 강릉 초당성당 220517 위치 ; 강원도 강릉시 연당길 49(초당동 137) 전화번호 : 033) 652-9770 촬영 일자 : 2022년 5월 17일, 맑음 홈페이지 : m.cafe.daum.net/cdhp 춘천교구 초당성당 홈페이지 홈피 운영에 필요한 정보 m.cafe.daum.net 초당 성당은 1996년 3월 1일 옥천동 본당에서 분리 신설되었으며, 주보성인은 '나자렛의 성 요셉'이다. 춘천교구장 장 익 주교는 초당 마을의 중심부에 성당을 신설하기로 결정하고 이곳 강릉시 초당동 137번지에 바다와 소나무가 어우러지고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교구를 대표할만한 아름다운 성전으로 건축하기 위하여 설계부터 건축가 및 조형 예술가들과 구상하고 1997년 5월 18일 현 성당이 위치한 부지에서 성전 건축 기공식을 가졌으며, 본당.. 더보기
<아름다운성당> 부여 금사리성당 220121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성충로1342번길 21(금사리) 충청남도 기념물 제143호 / 1906년, 부여군 최초의 성당 건물 촬영일자 : 2022년 1월 21일 금요일, 맑음 대성당 대성당 내부 모습 옛 성당 건물 전시관 사무실과 사제관 성모 동굴 외부에서 본 성당 전경 더보기
<국내성지172> 황석두 성인 안장지, 삽티 성지 220121 삽티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홍산으로 피신하여 선교 활동을 한 시절부터 교우들이 숨어 살기 시작한 곳이다. 1850년대에 충북 연풍에서 배척받은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가족들과 삽티로 이주하였다. 황석두의 양자 황천일 요한과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도 여기에 살았다. 황석두 성인은 인근 산막골에서 선교사 페롱(Feron) 신부를 보필하면서, 하부 내포의 산골 교우촌들을 순회하여 돌보았다. 병인박해로 1866년 3월 30일에 갈매못에서 성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와 함께 순교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황천일과 황기원이 수습하여 그해 5월에 여기 삽티에 안장하였다. 이 때문에 황천일과 황기원이 홍산 관아에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으며, 56년 뒤에 황기원의 딸 황 마르타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병인년) 4월 1.. 더보기
<국내성지171> 하늘아래 첫공소, 구룡 공소 211229 현재 용성 성당 관할의 구룡 공소는 청도군 운문면, 영천시 북안면, 경산시 용성면의 경계에 위치한 구룡산(675m) 정상 가까이에 있는 공소로,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릴 정도로 첩첩산중에 위치하고 있다. 살티의 김영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간월에서 체포되어 풀려난 뒤 이곳 자인골 용성면 매남 3리(큰골)로 와서 3년간 살다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다시 언양의 안살티로 가서 살았다. 로베르 신부의 1887년 사목 보고서에 따르면, 이 공소에 60명의 신자가 있었다. 1921년에는 대구교구장인 드망즈 주교가 로마 성모 대성당을 주보로 정한 뒤, 준본당으로 축성하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한국 전쟁 동안 신자들은 피난을 가지 않고 공소를 지켰는데, 1952년 10월 이영조 가밀로 회장을 중심으로 공소 예절을 거행.. 더보기
<국내성지170> 경주 관아와 옥 터(성건 성당) 211229 경주 관아와 옥 터는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 죄인으로 몰려 관장 앞에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던 곳이다. 1815년 을해박해 때에는 고성운 요셉, 고성대 베드로, 구성열 바르바라, 최봉한 프란치스코, 서석봉 안드레아,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안치룡 등 40여 명이 고초를 당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1860년 경신박해 때에도 10명의 신자들이 경주 관아와 옥에서 문초를 당했다고 한다. "10명이 경주 감옥에 갇혀 있는데 3명은 문초를 당할 때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고생하며 함구합니다. 그들 중 16세 된 소년이 있는데, 옥 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최.. 더보기
<국내성지169> 평화의 안식처, 성직자 묘지 211228 1915년에 조성된 성직자 묘지는 대구대교구청 내에 자리하며, '남산 100년 향수 길'인 성모당, 성 유스티노 신학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과 이어져 있다. 이곳에는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를 비롯한 7명의 주교, 6명의 몬시뇰, 63명의 사제, 그리고 2명의 차부제가 잠들어 있다. 묘지 입구에는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는 "그의 운명을 돌이켜 보며 네 운명도 같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다."(집회 38,22)에서 따온 라틴 말이다. 묘지를 들어서면 큰 화강암 십자가가 보이는데, 그 아래에는 "그때 하늘에서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마태 24,30)라고 적혀 있다. 이는 공심.. 더보기
<국내성지168> 성 유스티노 신학교 211228 대구대교구의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를 설립하고자 했지만 재정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그런데 중국 상하이의 어떤 신자가 거액을 희사하면서 '유스티노 성인'을 주보로 모실 것을 요청하여,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1945년 3월 19일 문을 닫기까지 모두 67명의 사제가 배출되어 삼남 지방의 신자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한 사목 활동을 하였다. 이후 40여 년이 지난 1982년 '선목 신학대학'으로 재개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3호)은 프와넬 신부가 설계하였고,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맡았으며, 책임자는 프랑스 영사관을 건축할 때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ㄷ자형 평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