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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조선왕조 이궁, 경희궁 200209 사적 제271호.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5대궁 중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다. 광해군이 정원군(定遠君:元宗 : 인조의 아버지)의 집 근처인 색문동(塞門洞)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부사(府使) 신경희(申景禧)의 말에 따라 이곳의 왕기를 제압하기 위해 1617년(광해군 9)에 수백 호의 여염집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경덕궁을 짓기 시작하여 3년 뒤인 1620년 완공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경덕궁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등극한 인조는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그뒤 효종부터 철종에 이르는 10여 명의 임금이 살았다. 현종과 숙종은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에 화재와 수리가 특히 많았다. 숙종은 이 궁의 정전인 회상전에서 태어나 융복전(隆福.. 더보기
조선왕조 별궁, 덕수궁 200208 덕수궁의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도성 내 궁궐이 모두 소실되어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가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 행궁으로 사용하면서 궁궐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광해군이 1611년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고 새로이 전각들을 건축하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으뜸 궁궐로 삼았다. 으뜸 궁궐의 격에 맞는 궁궐 조성을 위해 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하였으나 이미 자리 잡은 미국, 영국, 러시아 공사관과 선교사 주거지로 인해 궁역의 경계가 불규칙해졌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 예원학교와 덕수초등학교, 옛 경기여고 일대를 포함하는,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현재의 덕수궁 영역 외.. 더보기
조선왕조 이궁, 창경궁 200128 본래 창경궁 터에는 1418년에 세운 수강궁이 있었다. 수강궁은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창덕궁 동편에 창건한 궁이었다. 1483년에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사실상 하나의 궁궐을 이루어 이 둘을 합쳐서 동궐이라 하였고, 후원의 정원도 공동으로 이용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했다. 임진왜란(1592년) 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에 재건되었다. 이때 다시 세운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 등은 창경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건물들에 속한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시민.. 더보기
조선왕조 제2정궁, 창덕궁 200107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은 1405년에 제2의 왕궁으로 창덕궁(昌德宮)을 창건했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하여 균형 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270여 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 왕조 제1의 정궁으로 역할 하였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동쪽의 창경궁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궐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궁궐 예제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복궁 역시 이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은 인위적인 제도를 벗어나 주변 자연 지형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 더보기
조선왕조 정궁, 경복궁 200103 조선의 죽은 임금들의 집이 왕릉과 종묘라면, 살아있는 임금들의 집이 궁궐이다. 조선왕조 518년(1392-1910)간 27대 임금들이 한양 도성 안에 5개의 궁궐(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을 짓고 살았다. 한 왕조가 500년 동안 유지된 것도 흔치않은 일이지만 하나의 도시 안에 5개의 궁궐이 보존되어 온다는 것도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다. 오늘은 그 5대 궁궐 중에서 최초의 궁궐이자 왕조 마지막까지 영욕을 감내해 온 조선왕조 정궁 경복궁을 둘러본다.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왕조 개국 4년째인 1395년에 처음으로 세운 으뜸 궁궐이다. "하늘이 내린 큰 복"이라는 뜻으로 경복궁이라 이름 지었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목멱산(지금의 남산)을 안산으로 삼아 풍수지리적인 터잡기에서도 한양의 중심을 차지했다... 더보기
조선왕실 사당, 종묘 191228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덤을 만들어 백을 모시고 사당을 지어 혼을 섬긴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출발한 조선왕실은 왕릉을 조성하여 백을 모셨고 사당인 종묘(宗廟)를 지어 역대 왕과 왕비의 혼이 깃든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며 섬겨왔다. 오늘은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인 한양에 종묘를 건설(1395, 태조 4)한지 624년이 흐르도록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침묵 속에 자리를 지켜온 종묘를 찾아 답사를 한다.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종묘는 오전 9시 20분부터 시간제 예약을 받아 해설사 동반하에 관람이 가능하고 매주 토요일은 9시부터 자유관람이 허용된다. 나는 종묘의 전체 윤곽을 보기위해 우선 입구의 종로대로 건너편에 있는.. 더보기
<조선왕릉> 마지막 왕릉 남양주 홍릉과 유릉(2) 191224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전화 : 홍유릉관리사무소 031)591-7043 홍유릉(사적 제207호)은 홍릉과 유릉을 합쳐 부르는 말로, 조선 말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의 위에 오른 고종과 순종의 능이다. 홍릉은 조선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제인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합장능이고, 유릉은 조선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 첫번째 황후인 순명황후 민씨, 두번째 황후인 순정황후 윤씨의 삼합장능이다. 홍릉과 유릉은 기존의 조선왕릉 형식과 다르게 대한제국의 황제릉으로 조성되었다. 황제릉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 한 후 명나라 황제의 예를 참고하고, 기존 조선 왕릉의 예를 계승하여 조성한 능이다. 제향공간에 있던 정자각 대신 침전을 두었고, 침전 앞부터 홍.. 더보기
<조선왕릉>영월여행, 영월 장릉(1)과 남양주 사릉(1) 191216 오늘은 이씨조선 임금 중에서 가장 비운의 임금 제6대 단종의 무덤인 장릉을 찾아 강원도 영월로 갔다. 단종(端宗)(1441-1457, 재위 1452-1455)은 제5대 문종의 아들로 1452년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세상을 뜨자 12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의 출산 후유증으로 출산 후 하루 만에 승하하였고, 단종의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1453)으로 권력을 잡자 1455년(단종 3) 세조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이 시도한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1457년(세조 3)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으며, 그 해 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물에 잠기자 영월읍내에 있는 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