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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성지

<국내성지050> 죽림동 주교좌성당과 6.25순교자 성직자묘역 190102 죽림동 주교좌성당의 전신은 '곰실 본당'이다. 곰실 본당은 1920년 9월 22일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공동체이며,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고자 현재의 자리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성당은 1949년 4월 5일 신축 기공식을 가지고 거의 완공 단계였으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성당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과 부속 건물이 대파되었다. 전란 중에도 복구 작업을 진행하여 1956년 6월 8일 죽림동 성당의 주보 축일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우리나라 1950년대 석조 성당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건물로 인정되어 등록 문화재 제54호로 등록되었다. 죽림동 주교좌성당의 뒤뜰에는 교구 성직자 묘역이 있는데, 이곳은 춘천교구에서 활동하다가 선종한 사제들이 잠든 곳인 동시에 신앙을 증언하고 목자로서의 소명을 다하려고 .. 더보기
<국내성지049> 충청도 최초의 본당, 합덕성당 181225 합덕 성당은 공세리 성당과 더불어 충청도 최초의 본당이다. 합덕을 포함하여 조선 시대 내포 지방은 규모가 크고 중요한 신앙 공동체가 많았다. 그래서 박해의 피해가 어느 곳보다도 극심했으며, 그 때문에 대부분의 교우촌 공동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1886년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한국 천주교회는 내포 교회의 재건을 위해 양촌 본당과 간양골 본당을 설립한다. 양촌 본당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합덕 본당이 되었다. 이후로 본당은 충청도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전은1929년 페랭 신부가 세웠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성당은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할뿐 아니라 지역민의 근대 의식 성장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당 관내에는 복자 원시장.시보 형제의 .. 더보기
<국내성지048> 순교자 박선진 박태진의 묘, 신평 원머리성지 181225 원머리는 이존창 성인이 내포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1785년부터 조선 교회의 시작과 함께 교우촌이 형성된 아주 오래된 곳이다. '원머리'는 갯벌을 개간하여 논으로 사용하려고 둑을 쌓은 '언(堰)의 첫머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 이름처럼 신자들은 염전, 어업, 농업에 종사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에 20명의 신자들이 홍주와 해미, 수원에서 순교하였다. 원머리 성지에는 현재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한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두 분의 묘가 마을 한복판에 모셔져 있다. 순교자 묘 인근에는 원머리 공소 강당이 보존되어 있으며, 원머리와 역사를 같이 하는 새터 공소와 음섬 공소의 강당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건물들과 순교자들의 묘는 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신앙 공.. 더보기
<국내성지046> 다블뤼 주교 유적지, 신리성지 181225 신리는 조선시대 천주교 수용 초기부터 형성된 교우촌으로 주민 400여 명이 모두 신자일 정도로 규모가 컸다. 신자들이 많았던 만큼 박해도 심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한 곳이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를 통해 마을 전체 신자가 순교하거나 피난할 정도였는데 인근에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가 이를 말해 준다. 신리는 박해를 겪는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도 하였다. 서해를 통해 들어오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착지였고,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머무르며 사목 활동을 한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 황석두 루카, 손자선 토마스가 신리에서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과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후일 성인이 되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 더보기
<국내성지045> 한국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진산성지 181214 진산 성지는 1791년 제사 문제로 촉발된 진산 사건(신해박해)으로 한국 최초로 순교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곳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회는 미신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던 제사를 금지하였고, 그 가르침을 따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실천 때문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들의 제사 거부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불효의 죄로 체포된 윤지충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형벌과 죽음을 각오하고 덕을 쌓는 것이 효성이 부족한 것입니까?"라고 항변 하였고, 천주교를 버리라는 말에, "만약 제가 높으신 하느님 아버지를 버린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와 그의 사촌 권상연은 전주에서 처형되어 참수로 치명한 .. 더보기
<국내성지044> 손선지 성인과 정문호 성인의 고향, 부여 홍산 지석리 181214 지석리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숲정이에서 순교한 손선지 베드로와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이다. 두 분은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어려서 입교한 손선지 성인은 열심한 신앙으로 16세 때 샤스탕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병인박해 때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정문호 성인은 천주교를 알게 되자 곧 입교했는데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조차 깊은 사랑을 받았다. 그 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대성동 신리골에서 손선지 성인과 함께 살았다. 두 성인은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는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을 간직하.. 더보기
<국내성지043> 서천지역 신앙선조들의 교우촌, 산막골(작은재) 181214 천방산 자락의 산막골은 서천지역 신앙 선조들의 교우촌들 가운데 하나이다. 1839년 기해박해 뒤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곳이다. 서천지역 순교자들 가운데 기록이 남아 있는 순교자들은 57명에 이른다. 여러 교우촌 가운데 산막골이 가장 컸다. 산막골은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페롱 신부가 1858년부터 거주하며 사목 활동을 한 곳이다. 그가 1858~1865년까지 보낸 서한들 가운데 산막골에서 보낸 편지가 6통 남아 있고, 조안노 신부가 1862년 11월 4일에 산막골에서 보낸 편지가 1통 전해진다. 또한 산막골은 황석두 루카 성인 일가가 충북 연풍에서 이주하여 병인박해 전까지 10여 년 동안 살던 곳이다. 이와 함께 천방산 기슭 광장(고갯마루,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 더보기
<국내성지042> 성모 신심이 시작된 곳, 수리치골성모성지 181213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숨어 살던 교우촌으로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조직된 뜻 깊은 장소이다. 한국 교회의 성모 신심이 시작된 곳이며, 공주 지방의 신앙 공동체 형성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교우촌이다. 중국 상해에서 첫 사제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0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신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1846년 뜻밖에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수리치골로 피신하였다. 그해 11월 2일 두 선교사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조선 교회가 박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다. 성모 성심회는 수리치골의 한 오두막집에서 몇 명의 신자들로 시작한 작은 단체였다. 하지만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