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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성지

<국내성지041> 줄무덤 & 새터, 청양 다락골성지 181213 산골 마을 청양 다락골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최양업 신부의 할아버지 최인주가 모친 경성 이씨를 모시고 피난해 오면서 교우촌으로 거듭났다. 이곳에서 한국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와 그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탄생했으며, 무명 순교자들의 줄무덤이 있는 곳이다. 최경환은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고, 부인 이성례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서, 시복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다락골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곳이다. 서울에서 먼저 체포된 앵베르 주교가 교우들의 피해를 막고자 다락골에 피난해 있던 두 선교사에게 자.. 더보기
<국내성지040> 바닷가 모래밭 처형장, 오천 갈매못순교성지 181213 갈매못 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등 다섯 성인과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바닷가로 한국 교회의 순교사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곳이다. 신리(충남 당진시 합덕읍)에서 먼저 체포된 다블뤼 주교는 더 이상 많은 교우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자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에게 자수를 권고하였다. 이에 순명하여 두 선교사가 신리로 와서 자수하였고, 황석두 루카도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조선 왕실이 경사를 앞두고 있어 서울 인근에서 피를 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여 멀리 보령 갈매못으로 보내 처형하게 했다. 갈매못은 수군들이 주둔하는 군사 요충지였다. 세 선교사들과 황석두 루카가 갈매못으로 이송.. 더보기
<국내성지039> 조화서,조윤호 부자 성인의 교우촌, 신창 남방제 181212 남방제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며, 조윤호 요셉 성인이 태어난 곳이고 조화서 베드로 성인과 여러 순교자들이 사셨던 곳이다. 조윤호의 가문은 구교우 집안으로 본디 경기도 수원 도마지에 살았다. 할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순교하고, 할머니 권 율리아나가 선종하자 아버지 조화서는 남방제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1848년 조윤호를 낳았다. 조화서는 1850년 경부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로서 전국 각처에 숨어 있는 교우들을 순방하는 길에 함께 하였다. 조윤호는 1865년에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한 뒤 이듬해 이 루치아와 혼인하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1866년 12월 5일 밤 포졸들이 급습하여 조윤호와 아버지 조화서를 체포하였다. 이들은 전주.. 더보기
<국내성지038> 아산 공세리성당 181212 1890년 설립된 공세리 성당은 합덕 성당과 더불어 충청도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본당으로, 조선 시대에 순교한 32위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공세리 성당 주변은 조선 시대 충청도 내포 지방의 바닷가 입구로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포구였다. '공세리'라는 지명은 내포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에서 유래하였다. 공세리 성당의 첫 터전은 예산 간양골에 있었으나 폐지된 공세창을 매입하여 1895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지금의 성당 건물은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드비즈 신부가 설계하여 1922년에 완공하였다. 근대 고딕식 벽돌 건물로 충청남도 기념물 144호로 등록되어 있다. 성지 내에는 순교자들의 납골식 묘와 현양탑이 있고, 옛 사제관을 개조하여 만든 박물관.. 더보기
<국내성지037> 줄무덤 성지, 천안 성거산성지 181212 성거산 일대는 1800년대 초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온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들이 곳곳에 있었다. '학의 둥지와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소학골과 인근의 서들골을 중심으로 여러 교우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던 산골 신앙 공동체였다. 성거산 교우촌은 산골이면서도 주변의 다른 신앙 공동체들과 연락을 취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런 까닭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성거산에 와서 휴식과 사목활동을 하며 편지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고, 주변의 공주와 서천, 충북 배티, 경기도와 경상도의 교우촌들과 연계도 가능했다. 이곳에서 활동한 성직자는 다블뤼 주교, 최양업 신부, 메스트르, 페롱, 프티니콜라 신부 등이 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성거산 출신의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1866년 성거산에서 잡힌 배문호 베드.. 더보기
<국내성지036> 김대건 신부 성장지 및 사목지, 은이.골배마실 181204 은이 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요 순교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36년 모방 신부에게 세례성사와 첫영성체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으로서, 한국 천주교회에서 첫 번째로 사제성소의 열매를 맺은 곳이다. 1845년 조선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 활동은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곳에서 순교전 공식적인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였다. 곧 은이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성장(산 너머 골배마실), 세례성사, 신학생 선발, 사제 서품후 사목 활동의 직접적인 장소로서 한국 천주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골배마실'은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지네가 많아 '뱀 마을(배마실)'이라고 불려 왔다. 김대건(7세)의 조부 택현과 가족들은 1827년경 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용인.. 더보기
<국내성지035> 성 남종삼 요한 묘 181201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율대리 서울대교구 길음동 성당 묘원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남종삼 요한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성인의 부친 남상교,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한 장자 남규희 등 삼대 순교자의 묘소가 있다. 남종삼 성인은 '승지'로 103위 성인 가운데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1863년 말경,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며 통상을 요구하던 차에 남종삼은 '이이제이방아책(以夷制夷防俄策)'이라 하여 서양 프랑스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대원군은 주교와 만나려 했으나 만남이 늦어지고, 정치적 상황이 바뀌며 1866년 2월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남종삼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50세로 순교하였다. 남종삼의 시신은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 더보기
<국내성지034>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181201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리었으며, 16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천주교의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하였고, 그 후 활짝 열려 있던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고난과 박해만이 기다리는 신앙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다 마침내 1801년에 순교하였다.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를 갔고, 외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남겨져 선종하였다.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상황과 대비책을 적어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고 준비했던 '백서'는 젊은 학자의 용기있는 표현이며,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이다. 황사영의 세례명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와 달레의 한국 교회사에서 '알렉산델'로 알려졌으나 1990년대 교회사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알렉시오'임이 밝혀졌다. 황사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