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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성지

<국내성지033> 병인박해 5인 순교지, 양주순교성지 181201 경기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의정부교구의 순교성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보면 병인박해(1866~1873년) 때 3곳, 송도, 장단, 양주 관아가 있다. 송도와 장단은 갈 수 없는 곳이고, 양주 관아만이 현재 갈 수 있는 곳이다. 양주에서는 다섯 분이 순교하셨는데, 1866년 순교한 김윤오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김 마리아(남편은 김대건 부제와 중국으로 가서 선종), 박서방, 그리고 1868년 순교한 홍성원 아오스딩 등이다.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는 지난 2008년 "경기북부 지역과 한국 천주교" 심포지엄을 통해 치명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양주의 정확한 순교지를 찾았고, 성지터를 확보하여 2016년 5월 28일 교구장 이기헌 주교님의 집전으로 순교성지 선포식을 가졌다. 현재 성지 개발 중이며 담당 사제가 .. 더보기
<국내성지032> 북수동성당과 수원화성 전역, 수원순교성지 181124 수원 성지는 정조 대왕의 정치 무대로 다산 정약용(사도 요한)이 설계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수원 화성 전역이다. 수원 화성에서 박해 시대 동안 무명 순교자를 비롯한 2천여 명 이상이 순교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순교터는 토포청, 이아, 화성행궁, 간이옥, 종로 사거리, 형옥, 동남각루, 팔달문 밖 장터, 장안문 밖 장터, 동북포루, 동암문, 남암문, 북암문, 사형터, 화서문, 매향다리 서남쪽, 동북포루, 동장대, 용주사 포교당 자리 등 총 19군데에 이르며 매월 첫 금요일 밤에 달빛 순례가 진행된다. 조선 후기 하느님의 종 순교자 원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17위와, 근.현대 하느님의 종 순교자 심 폴리 신부를 비롯한 3위, 이렇게 총 20위 하느님의 종 수원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하여 매주 토요일 .. 더보기
<국내성지031> 병인박해 순교자 3위비, 갑곶순교성지 181115 강화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고려 시대부터 외세와 격렬하게 충돌해 온 역사의 현장이다. 이런 강화 지역이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와 연이은 병인박해 때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조선 정부가 프랑스 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프랑스 함대가 바로 이곳 갑곶 돈대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결국 프랑스 군은 후퇴했으나 이 때문에 강화 지방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극심했던 박해의 하나로 기억되는 병인박해가 시작되게 된다. 이 박해로 1868년 최인서, 장치선, 박서방, 조서방 등이 강화 진무영에서 순교했고, 1871년 박상손, 최순복, 우윤집 등이 강화 갑곶 진두에서 효수되었다. 성지에는 순교자 3위비가 세워져 그분들의 넋을 .. 더보기
<국내성지030> 해상 경비 군영이자 천주교 신자 처형지, 진무영 순교성지 181115 진무영(鎭武營)은 조선 시대에 해상 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軍營)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병인양요(1866년)를 촉발시킨 서울 애오개('아현'의 옛 지명) 회장 최인서 요한, 장주기 성인의 조카 장치선, 박순집의 형 박서방, 조서방 등이 이곳 진무영에서 순교하였다. 진무영은 1700년(숙종 26년) 강화부에 그 본영을 설치하고, 1779년(정조 3년) 통어영을 병합하였다가 1789년(정조 13년) 다시 분리하였다. 특히 1866년의 병인양요 이후, 외국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여 쇄국 정책을 쓴 당시로서는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국방상 중요한 군영이었다. 강화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더보기
<국내성지029> 침묵의 순례지,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181115 한국 천주교회는 적게는 1만 명, 많게는 3만 명의 순교자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2천 명도 채 안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에 2001년 당시 인천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는 강화도에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하여, 이를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에게 봉헌하였다. 또한 이곳은 인천교구가 2004년에 설립한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과 인접하여 있어 젊은이들과 자연과 순교자들이 어우러지는 '침묵의 순례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양동산에는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무명 순교자들의 흔적을 묵상할 수 있도록 조성된 무명 순교자의 길이 있고, 묵주 연못, 무명 순교자상, 십자가의 길, 일만 위 순교자 현양탑,.. 더보기
<국내성지028>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 양근성지 181107 양근 성지는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한강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에게, 또 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대감마을 또는 한감개에 살고 있던 권철신에게 세례를 베푼 뒤 천주교 신앙생활(아침 기도, 저녁 기도 등)을 실천한 곳이다. 또한 양근 성지로부터 충청도와 전라도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으며, 지도자급 평신도들이 가성직 제도(또는 모방 성직 제도)로 성직자 역할을 하면서 미사와 견진성사를 2년간 집전하던 곳이다. 그래서 양근 성지를 천주교회의 요람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한편 이곳 양근 성지는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조숙 베드로, 권천례 데레사 동정 부부와 20여 명의 순교자들이 태어나거나, 신앙을 증언하다 체포되어 순교한 곳이다. 한.. 더보기
<국내성지022> '잊은터'와 '두둘기', 죽산순교성지 181012 죽산 순교성지는 천주교의 4대박해 중 하나인 병인박해(1866년)때, 수많은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봉헌한 곳이다. 충청, 전라, 경상도로 갈라지는 주요 길목인 죽산에는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조선 시대부터 일찍이 도호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인근의 교우들이 붙잡혀 오면 이곳에서 참담한 고문 끝에 처형되곤 했다. 현재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하여도 스물다섯 분이나 되는데, 이렇게 밝혀진 순교자 외에도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현 '죽산성지'인 사형장으로 끌려와 순교의 깃발을 올렸던 곳이다. 죽산 성지는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해서 '이진터'라 불렸다. 이러한 유래를 지닌 '이진터'가 병인박해 때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터'란 이름으로.. 더보기
<국내성지016> 무명 순교자들의 터전, 해미순교성지 141012 당산동성당 전신자 해미성지 순례 (2014년 10월 12일) 해미성지는 이름 모를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터전이다. 이름이 기록된 순교자는 132명에 이르지만 대부분은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들 가운데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해미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이유는 이곳이 서해안 방어를 위해 마련한 해미 읍성과 군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죄인들의 처형을 군인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충청도 서북부 내포 지방에서 잡힌 신자들 중 일부는 홍주와 공주로, 일부는 해미로 보내졌다.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면 목숨을 건질수 있었으나 한 번 알아 모신 하느님 아버지를 배반할 수 없다하여 순교에 이르렀다. 해미에는 조선 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