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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성지

<국내성지058> 바람이 허락하는 섬 추자도, 황경한 묘 190129 오늘은 바람이 허락해야 갈 수 있다는 섬, 추자도의 황경한 묘를 순례하기로 예정된 날이다. 아침 7시에 눈을 뜨자마자 창밖을 내다보니 동녘 하늘이 붉게 밝아오고, 주변 골프장의 억새풀도 미동도 없다. 어제의 암담했던 날씨에 비해 하룻밤새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곳이 제주도라는 섬나라이다.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9시 30분에 출항하는 씨월드고속훼리(064-758-4234)의 초쾌속선 퀸스타2호를 탔다. 이 배는 제주 - 추자 - 해남우수영을 왕복하는 배로, 돌아오는 배는 추자도에서 오후 4시30분에 출발한다. 제주 - 추자간 운항시간은 한시간 정도 걸리며, 추자도에서 6시간 정도의 활용시간이 있다. 퀸스타2호는 잔잔한 바다위를 쾌속으로 달려 드디어 상추자도 터미널에 승객들을 토해 놓는다. 우리는 어제 .. 더보기
<국내성지057> 신축교안 무명 순교자 묘역, 황사평 190128 다음은 제주 신축교안 때 희생당한 무명 순교자들과 성직자들이 잠들어 있는 황사평 성지로 간다. 네비게이션이 성지의 입구를 찾지 못해 성지를 바로 근처에 두고 뺑뺑 돌다가 후문 근처 주차장으로 안내한다. 황사평 성지는 시원하게 넓은 엄청 큰 묘지공원이다. 황사평 성지는 1901년 신축교안(辛丑敎案) 때 희생된 무명의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당시 조선 왕실의 재정 확보를 위해 파견되어 온 봉세관이 과다한 조세 징수로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고, 여기에 조세 중간 징수 관리자로 이용된 일부 신도들 때문에 교회는 많은 오해를 받았다. 그리고 미신 행위 등 신앙에 위배되는 지역 풍습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자주 주민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무리한 전교 활동과 왕실 조세 정책에 저항한 민회(民會).. 더보기
<국내성지056> 민란군에 의한 처형장, 제주 관덕정 190128 오늘은 제주교구 관할 성지 7곳을 순례하기 위하여 3박4일 일정으로 제주도로 간다. 천주교 주교회의가 선포한 성지 111곳 중 제주교구가 순례객들에겐 가장 어려운 순례지이다. 그중 황경한의 묘가 있는 추자도는 하늘이 뱃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이다. 2주 전에 장기 일기 예보를 감안하여 비행기, 콘도, 렌트카를 예약했는데 다행히 4일 중 마지막 날만 비 예보이다. 4일 중 가장 화창한 두번째 날에 추자도 왕복 뱃편을 예약했다. 이번 순례길에는 대학 입학동기이자 53년지기인 이재현 요셉 부부가 동행을 해서 더욱 의미가 있고 든든하다. 12시에 김포공항을 이륙한 KAL기는 오후 1시에 제주공항에 도착했고, 제주의 날씨는 예보와는 달리 흐리고 바람이 강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성난 파도가.. 더보기
<국내성지055>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190123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오늘도 그를 본받아 이 땅의 참된 목자가 되려는 신학도들의 모든 삶에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효시는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하상을 비롯한 소년들에게 국내에서 신학 교육을 시키는 한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중 김대건과 최양업만이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활동하다가 순교했던 것이다. 그 후 1855년 배론에 성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신학 교육을 시작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폐쇄되었고 1885년 강원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부엉골)에서 현 가톨릭 신학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예수성심신학교가 문을.. 더보기
<국내성지054> 가장 작은 공소, 금광리공소 190104 금광리 공소는 1887년에 세워졌고 영동 지역 천주교의 모태와 같은 곳이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66년 9명의 선교사와 수천 명의 교우들이 처형되면서부터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기까지 계속되었던 병인박해라고 할 수 있다. 병인박해를 피해 이주한 신자들은 깊은 산속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교우촌을 형성하고 신앙을 전파하면서 생활하였다. 금광리 공소는 한때 영동 지역의 전교 거점 지역으로, 1921년 이철연 프란치스코 신부의 부임과 함께 본당으로 설립될 만큼 신자 수가 많았으나, 향후 신자 수의 증가와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여 1923년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하기도 하였다. 현재 노암동 본당의 공소인 이곳은, 박해를 피해 정착하.. 더보기
<국내성지053> 강릉 대도호부 관아 190104 관아는 넓은 의미로는 관원들이 모여 나랏일을 보던 곳 전체를 의미하지만, 좁게는 지방관이 파견되어 업무를 보던 곳을 말한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조선 시대 강릉 대도호부 행정 기관이 위치한 읍치의 공간이다. 1994년 강릉 임영관지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11월 27일 강릉 대도호부 관아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객사문인 임영관 삼문(국보 제51호), 칠사당(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 이외에는 대부분 훼손된 것을 복원하였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조선 시대 강릉에 있던 현재의 시청과 같은 역할을 하였지만, 사법권이 있어 죄인을 심문하거나 옥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이 현재와 다른 차이점이라 하겠다. 관아에서는 박해 당시 신자들을 심문하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관할 옥에서 .. 더보기
<국내성지052> 양양 아기예수의 성녀데레사성당과 38선 티모테오순례길 190103 양양 성당은 1921년 4월 영동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본당으로, 최문식 신부가 상도문리에 천주당을 세운 것이 기초가 되어 양양 본당이 설립되었다. 1922년 2월 양양읍 서문리로 본당을 옮겼다가, 1936년 대홍수로 성당이 침수되어 193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성당을 신축하였다. 1937년 7월 양양 본당에 부임한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 해방 뒤 북한에서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북쪽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남쪽으로 무사히 넘어가도록 도와주었으나 정작 본인은 "양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월남하지 않았다. 또한 평강과 이천에서 사목하던 신부들이 체포되자 이곳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하였고, 전쟁이 일어난 뒤에도 끝까지 남아 교우들을 돌보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광재 신부는 1950년 10월 9일 .. 더보기
<국내성지051> 춘천교구의 요람, 곰실공소 190102 곰실은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의 옛 지명이며, 곰실 공소는 엄주언 마르티노가 세운 공동체로 현 춘천교구의 요람이다. 엄주언은 우연히 접한 [천주실의]와[쥬교요지]에 감명을 받고 온 가족이 천진암으로 가서 교리 공부를 하고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춘천 서면 월송리로 돌아와 전교를 하였으나 지역 주민들의 배척을 받았다. 1910년경 곰실 윗너부랭이로 이주한 엄주언은 집 옆에 강당을 세우고 가족들끼리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공동체가 확대되면서 교우 수가 증가하자 아랫너부랭이로 옮기고, 당시 관할 본당이었던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사목 방문을 부탁하였다. 곰실 공소의 교우 수가 더욱 증가하자,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세웠으며, 그해 9월 김유룡 필립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