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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사적지

<국내성지061> 성 김대건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 용수성지 190130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해안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중국 상해항을 출발하여 서해로 귀국하다가 표착한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같은 해 8월 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 하던 중 큰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이곳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였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은 고국에서의 감격 어린 첫 미사를 용수리 해안에서 봉헌하고, 배를 수리한 후 이곳을 떠나 전라북도 금강 하류 나바위로 상륙하여 귀국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경기도 용인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846년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해 9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5세.. 더보기
<국내성지052> 양양 아기예수의 성녀데레사성당과 38선 티모테오순례길 190103 양양 성당은 1921년 4월 영동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본당으로, 최문식 신부가 상도문리에 천주당을 세운 것이 기초가 되어 양양 본당이 설립되었다. 1922년 2월 양양읍 서문리로 본당을 옮겼다가, 1936년 대홍수로 성당이 침수되어 193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성당을 신축하였다. 1937년 7월 양양 본당에 부임한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 해방 뒤 북한에서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북쪽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남쪽으로 무사히 넘어가도록 도와주었으나 정작 본인은 "양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월남하지 않았다. 또한 평강과 이천에서 사목하던 신부들이 체포되자 이곳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하였고, 전쟁이 일어난 뒤에도 끝까지 남아 교우들을 돌보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광재 신부는 1950년 10월 9일 .. 더보기
<국내성지049> 충청도 최초의 본당, 합덕성당 181225 합덕 성당은 공세리 성당과 더불어 충청도 최초의 본당이다. 합덕을 포함하여 조선 시대 내포 지방은 규모가 크고 중요한 신앙 공동체가 많았다. 그래서 박해의 피해가 어느 곳보다도 극심했으며, 그 때문에 대부분의 교우촌 공동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1886년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한국 천주교회는 내포 교회의 재건을 위해 양촌 본당과 간양골 본당을 설립한다. 양촌 본당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합덕 본당이 되었다. 이후로 본당은 충청도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전은1929년 페랭 신부가 세웠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성당은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할뿐 아니라 지역민의 근대 의식 성장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당 관내에는 복자 원시장.시보 형제의 .. 더보기
<국내성지048> 순교자 박선진 박태진의 묘, 신평 원머리성지 181225 원머리는 이존창 성인이 내포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1785년부터 조선 교회의 시작과 함께 교우촌이 형성된 아주 오래된 곳이다. '원머리'는 갯벌을 개간하여 논으로 사용하려고 둑을 쌓은 '언(堰)의 첫머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 이름처럼 신자들은 염전, 어업, 농업에 종사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에 20명의 신자들이 홍주와 해미, 수원에서 순교하였다. 원머리 성지에는 현재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한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두 분의 묘가 마을 한복판에 모셔져 있다. 순교자 묘 인근에는 원머리 공소 강당이 보존되어 있으며, 원머리와 역사를 같이 하는 새터 공소와 음섬 공소의 강당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건물들과 순교자들의 묘는 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신앙 공.. 더보기
<국내성지047> 내포천주교 복음 첫터, 여사울성지 181225 여사울은 충청도의 첫 천주교 신자인 이존창 루도비코의 고향이다. 그는 1784년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내포(內浦)라 불리는 충청도 서북부 지역에 복음을 전하여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므로 그를 '내포의 사도'라 부른다. 그의 뛰어난 학덕과 영향력,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사울과 인근 지역에 천주교가 널리 전해졌다. 여사울을 중심으로 내포 지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또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기에 이곳을 '신앙의 못자리'라고도 부른다. 여사울은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 성인을 배출한 곳이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한 김광옥 안드레아와 그의 아들 김희성 프란치스코의 고향이다. "충직한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한 김광옥의 말처럼 여사울은 조선 후기 박해 시대.. 더보기
<국내성지046> 다블뤼 주교 유적지, 신리성지 181225 신리는 조선시대 천주교 수용 초기부터 형성된 교우촌으로 주민 400여 명이 모두 신자일 정도로 규모가 컸다. 신자들이 많았던 만큼 박해도 심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한 곳이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를 통해 마을 전체 신자가 순교하거나 피난할 정도였는데 인근에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가 이를 말해 준다. 신리는 박해를 겪는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도 하였다. 서해를 통해 들어오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착지였고,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머무르며 사목 활동을 한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 황석두 루카, 손자선 토마스가 신리에서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과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후일 성인이 되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 더보기
<국내성지045> 한국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진산성지 181214 진산 성지는 1791년 제사 문제로 촉발된 진산 사건(신해박해)으로 한국 최초로 순교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곳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회는 미신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던 제사를 금지하였고, 그 가르침을 따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실천 때문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들의 제사 거부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불효의 죄로 체포된 윤지충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형벌과 죽음을 각오하고 덕을 쌓는 것이 효성이 부족한 것입니까?"라고 항변 하였고, 천주교를 버리라는 말에, "만약 제가 높으신 하느님 아버지를 버린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와 그의 사촌 권상연은 전주에서 처형되어 참수로 치명한 .. 더보기
<국내성지044> 손선지 성인과 정문호 성인의 고향, 부여 홍산 지석리 181214 지석리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숲정이에서 순교한 손선지 베드로와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이다. 두 분은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어려서 입교한 손선지 성인은 열심한 신앙으로 16세 때 샤스탕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병인박해 때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정문호 성인은 천주교를 알게 되자 곧 입교했는데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에게조차 깊은 사랑을 받았다. 그 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대성동 신리골에서 손선지 성인과 함께 살았다. 두 성인은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는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을 간직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