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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사적지

<국내성지084>장주기 성인 등 순교자들의 얼, 요당리성지 190308 요당리 성지는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교우촌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교우촌은 양간 공소라 불리며 갓등이(현재의 왕림)와 은이 공소(현재의 양지)와 깊이 연계되어 활발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또한 바닷물의 유입으로 뱃길이 열였던 이곳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 루트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을뿐아니라, 기해년(1839년)과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신앙의 요람지였다. 이곳 요당리 성지에서 태어났거나 순교한 분들 가운데에는 장주기 요셉 성인과 복자 장 토마스 등 여러 명의 순교자가 있다. 또한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의 책임 .. 더보기
<국내성지079> 최양업 신부 선종지, 진안리 190226 진안리 성지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한 곳으로 문경시 문경읍에서 문경 관문 방향으로 1km 정도 가면 닿을 수 있다. 조령, 이화령, 하늘재 등은 옛날부터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이름난 통로로서 숱한 전설과 애환이 서려 있다. 특히 일명 '새재'라고 하는 조령은 옛날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이다. 그러므로 조선 숙종 34년(1780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관문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제3관문인 조령관이 서 있는데 각각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이 지방이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이기에 과거는 물론, 최양업 신부와 칼레 강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더보기
<국내성지078>이윤일 성인과 서치보 가정의 교우촌, 여우목 190226 여우목 성지는 103위 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부근에 '건학'과 '부럭이(부락이)'라는 교우촌이 있어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지냈다. 소백산맥이 높고 험준한 대미산을 경계로 하여 충북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문경 지방의 최동 북단에 위치한 여우목은 옛날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 이곳을 거쳐 문경 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1839년 기해박해 무렵에 충청도 홍주가 고향인 성 이윤일 요한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그 무렵에 경상도 초대 교우 서광수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의 가정이 충북 청원에서 이곳으로 피난해 오면서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다. 서치보 요셉(1791~1840년)은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열.. 더보기
<국내성지076> 한국판 카타콤바, 죽림굴 신앙사적지 190215 죽림굴(대재 공소)은 기해박해(1839년)를 피해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해 온 교우들과 간월의 교우들이 좀 더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한 박해 시대(1840~1868년)의 공소로 언양 지방의 첫 공소인 간월 공소에 이은 두 번째 공소이다. 이 공소는 샤스탕 정 신부와 다블뤼 안 신부가 1840년부터 1860년까지 사목을 담당했던 곳이며, 경신박해(1860년) 때는 박해를 피해 들어온 최양업 신부가 3개월 동안 은신했던 곳이기도 하다. 최 신부는 이 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집전하며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 외에도 울산 장대에서 처형된 세 분의 복자 허인백, 이양등, 김종륜이 한때 이곳에서 머물렀으며, 김 아가타도 최 신부를 도우며 이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이후 계속되는 경신박.. 더보기
<국내성지074> 무두묘, 복자 정찬문 묘 190214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는 진주시 사봉면 출신으로 신자였던 아내의 권면으로 입교 영세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정찬문은 포졸에게 잡혀 진주 감옥에 갇힌다. 여러 번 심한 문초와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다. 특히 그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아기를 등에 업고 주먹밥을 나르던 부인 윤 씨의 격려는 그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쓰기까지 커다란 공헌을 했다. 결국 이듬해인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 순교자는 매를 많이 맞은 끝에 진주옥에서 그날 밤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죽은 뒤 그의 일가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 왔는데 머리를 가져오지 못한 채 하체만 장사 지냈다고 한다. 어찌하여 머리를 가져오지 못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순교자의 무.. 더보기
<국내성지072> 남의 문중산에 평장, 복자 박대식 묘 190213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는 1811년 김해시 진례면 시예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으며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부친 박민혁과 형제들은(대붕, 대흥, 대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병인박해를 만나게 된다. 병인박해 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으나, 1868년 무진박해 때 박대식은 조카인 박수연과 함께 붙잡힌다. 박대식은 경상 감영에서 연일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868년 8월 27일(음) 조카 박수연과 함께 참수 치명한다. 당시 박수연은 예비 신자 신분이었다. 박대식의 가족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 와 선산에 모시려하였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의 외인들이 반대하자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 삼 형제(종립, 종반, 종철)와 형제들이 마을 뒷산인 .. 더보기
<국내성지068> 조씨형제 순교자묘 190212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배씨(裵氏) 가문의 선산에는 배씨가 아닌 조씨(曺氏) 성을 가진 형제의 묘가 있다. 창녕 조씨 조석빈과 조석증 두 형제는 천주교로 개종한 뒤, 천주교 연구와 전교를 열심히 하였다. 그들은 생곡의 배정문의 동서학당에 은거하면서, 유학과 서학의 비교 연구에 힘쓰고, 한문 성경을 한서(漢書) 속에 감춘 나무 상자를 메고 양반 집안을 찾아다니며 전교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2년 뒤인 1868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가락면 상덕리 편도 부락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받으며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면서 신앙을 증언하다가 김해읍 왜장대에서 참수당했다. 고문을 하는 사람조차도 이들의 강인한 신앙에 감탄했다고 한다. 순교한 이들 형제의 시.. 더보기
<국내성지062> 복자 김기량 순교현양비 190131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 함덕리 출신으로 소규모 무역상이었다. 그는 1857년 초 제주 근해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한달가량 표류하다가 중국 광동성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인도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 신학생 이만돌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뒤 1857년 5월 31일 제주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는 제주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예비신자들의 세례를 위해 그들과 함께 육지에 자주 다녔는데, 여비 마련을 위해 거제도에 갔다가 체포되어 통영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장살형을 받아 수없이 많은 곤장을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이듬해 1월에 51세의 나이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관헌들은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까지 하였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