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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사적지

<국내성지118> 순교사적지, 좌포도청 터 190915 좌포도청은 한성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쪽(현 종로구 단성사 일대)에 위치하여 조선 시대 서울 동.남.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였으며, 중종 무렵 설치되어 고종 31년(1894년) 7월 경무청으로 개편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한 것은 1795년 북산 사건으로 발생한 을묘박해 때가 최초였다. 박해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103위 성인 가운데 22명, 124위 복자 가운데 5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기록상 명확하게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 민극가 스테파노, 허임 바오로, 남경문 베드로, 임치백 요셉 성인이 있다. 복자 가운데에는 1795년 을묘박해 때 윤유일 .. 더보기
<국내성지117> 순교사적지, 경기감영 터 190914 박해로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음에도, 점점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큰 타격을 입었다. 잡혀 온 경기 지역의 신자들은 한성 서대문 밖 반송방에 위치한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특히 가난하고 몸이 부실하며 배움도 부족했던 조용삼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에게 신앙을 배우며 따르다가 체포되어 11개월 동안 옥에 갇혔다.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는데,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옥에 갇힌지 며칠 지난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의 길을 걸었다.. 더보기
<국내성지113> 한정흠 순교사적지, 김제순교성지 190622 한정흠(스타니슬라오)은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출신으로 유항검 집에서 자녀들의 스승으로 생활하며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난 뒤에는 오직 교회 일에만 전념하였다. 신유박해 때 유항검과 함께 체포되어 전라 감영에서 혹독한 형벌과 심문을 받았다. 그 뒤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지만,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8월 11일 형조에서는 해읍정법에 따라 한정흠을 김제로 보내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사형 판결문에는, "유항검의 집에 다년간 머물면서 사학에 깊이 빠졌고, 그 가르침을 독실히 믿었다. 예수를 삼가 받들었고, 주문모 신부를 스승으로 섬겼다. 첨례를 지냈고, 요사스런 상을 받들었으며, 더러운 물건을 지니고 있었다. 사당을 허물고 .. 더보기
<국내성지112> 순교사적지, 전주 옥 터 190622 조선 시대 전주는 전라도 중심지여서 신자들이 각지에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혀 심문, 고문을 당하고 순교하였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동정 부부인 유중철과 그의 동생 유문석이 교살되었고, 이순이 루갈다는 옥중 편지를 작성하였다. 정해박해(1827년) 때는 24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 때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도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기해박해(1839년) 때는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홍봉주 토마스의 아내 심조이 바르바라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 때 생긴 상처로 옥중에서 순교하였으며, 순교 역사상 가장 어린 이봉금 아나스타시아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이봉금의 나이는 만으로 12세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박해 시기에 옥은 고통스러운 곳이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더보기
<국내성지108> 순교복자 인언민 사적지, 삽교 배나드리 190430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동남쪽 삽교천 가에 위치한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불렸다. 바다로 통하는 삽교천에 밀물 때면 사방에 물이 차 섬이 되어 배를 타고 다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16년 봄 경상도에서 발생한 박해의 영향이 배나드리에도 미쳤다. 내포 지방 출신 신자들이 경상도에 피신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1817년 10월 배나드리에서 20~30명 가량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중 민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순교하였다. 배나드리 인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순교자는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이다. 그는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례(삽교읍 .. 더보기
<국내성지104> 나주 순교자 기념 성당 190321 나주 성당 내에 위치한 순교자 기념 성당은 이춘화 베드로와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 등 네 분의 위대한 믿음과 삶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무덤 형태의 경당이다. 공주 출신 이춘화는 1839년 기해박해 때 나주에서 순교했고, 전북 용담 출신 강영원과 경상도 출신 유치성, 전남 장성 출신 유문보는, 1866년 병인년에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령을 내림으로 시작된 병인박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1871년에 나주 진영으로 잡혀 왔다. 유문보는 모진 고문 때문에 1872년 옥사로 순교하고 강영원과 유치성은 1872년 나주 진영 무학당(현 나주초등학교) 앞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였는데 백지사형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 더보기
<국내성지103> 가톨릭 목포성지, 산정동성당 190321 전라남도 지역의 본격적인 복음 전파는 병인박해를 피해 온 다른 지역의 교우들이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가톨릭 목포 성지는 1897년 5월 8일 설립된 광주대교구 첫 번째 본당(성십자가 성당, 현 산정동 성당)으로,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광주 4대 교구장이었던 패트릭 브렌난 몬시뇰과 토마스 쿠삭 주임 신부, 존 오브라이언 보좌 신부가 북한 인민군에 피랍되어 북한으로 이송 중 대전에서 처형된 순교 사제의 사목지이다. 이 세 분은 근 . 현대 신앙의 증인으로 시복 시성을 준비하고 있다. 1953년 5월 31일 이곳에서 2 개의 쁘레시디움('치명자의 모후, 평화의 모후')이 최초로 회합을 가지면서, 한국 레지오 마리애가 시작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 더보기
<국내성지102> 순교복자 3인 기념성당, 진목정 190405 경주시 산내면에 위치한 진목정은 인근 탑골과 상선필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피난 와서 살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후 1837년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부들이, 1850년경부터는 최양업 신부에 이어 다블뤼 주교와 리델 신부도 상선필과 이곳을 순회 선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병인박해 때는 울산 살티에 모여 살던 허인백(야고보),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의 가족이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산내면 소태동 범굴로 피신해 살았으나 체포되어 약 세 달간 모진 심문과 고문을 받은 뒤, 1868년 9월 14일(음 7월 28일) 동천 강가 울산 장대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유해는 허인백의 아내 박조예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울산 장대 옆 동천 강가 외진 곳에 묻어 두었다가 진목정..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