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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성지순례

<국내성지014> 외국인 사제 3 성인의 묘지, 삼성산 180307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이들은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복음 전파에 힘썼으며, 아울러 모방 신부는 당시 소년이었던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등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최초의 조선인 신부를 양성하였다. 한 배교자의 책략 때문에 앵베르 주교의 거처가 알려지자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치명,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더보기
<국내성지013> 생과 사의 갈림길, 광희문 180306 광희문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으로 사대문 사이에 세웠던 문) 중에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다. 본디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또는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이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왔고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버려졌으니 실로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 더보기
<국내성지012> 순교성인들이 일시 묻혔던 곳, 왜고개 180301 현재 국군중앙 주교좌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기와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중림동 약현 성당, 명동 성당 건물에 쓰인 붉은 벽돌도 여기에서 구운 것이라 전해진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베르뇌 주교 등과 남종삼, 최형, 홍봉주 등이 암매장되어 잠시 머물다 간 곳이다. 또한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도 새남터에서 교우들이 찾아내어 잠시 이곳 근처에 가매장했다가 미리내로 모셔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특히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는 노고산에 암매장된 지 4년 후에 당시 유해를 훔쳐 낸 교우들 중 하나인 박 바오로에 의해 그의 선산인 삼성산에 다시 안장되었다. 그 후 .. 더보기
<국내성지011> 옛 용산신학교 성당 180301 옛 용산신학교 성당 (원효로예수성심성당) 옛 용산신학교 성당인 성심성당은 조적조 양식으로 명동 주교좌성당과 중림동 약현 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신학교 성당이다. 일반 교구 성당과는 달리 평면 형식을 가진 이 성당은 지형의 특성을 잘 이용하여 지은 아담한 성당으로 현재 성심기념관 (구 용산신학교 생활관)과 더불어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902~1958년까지 이 성당에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셨다가 가톨릭 신학대학 이전과 함께 혜화동 신학대학으로 모셔 갔으며 또한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소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유해를 모시기도 했었다. 옛 용산신학교 생활관 (성심기념관) 현재 성심 수녀회 한국 관구 사무실과 성심기념관으로 쓰고 있는 옛 용.. 더보기
<국내성지010> 어머니의 성지, 당고개순교성지 180301 당고개 순교성지는 아홉 분의 순교 성인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이며 복자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곳이다. 당고개 성지는 가족들의 간절한 사연을 간직한 성인들이 많은 곳으로 특별히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을 찔레꽃 아픔이 매화꽃 향기로 가득 찬 어머니의 성지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젖먹이의 죽음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야만 했던 복자 이성례 마리아뿐 아니라 11남매 중 10남매를 잃어야 했던 손소벽 막달레나, 인간사 그 모든 것보다 신앙을 우선시하며 살았던 최영이 바르바라, 이경이 아가타, 또한 천국을 향한 신앙 교육을 중시한 가문의 아들들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끝까지 말씀에 의지하며 살았던 .. 더보기
<국내성지009> 평신도들의 순교터, 서소문순교성지 180303 서소문 성지는 조선시대 공식 사형 집행장으로,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과 최종 사형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다는 편의성,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칠패시장'이 있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처형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 처형장에서 순교하신 분은 신원이 확인된 분만도 100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44위가 시성되었는데 단일 순교지로는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하상 바오로와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성인 등이 있다. 또한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를 시복하셨다. 서소문에서 순교하신 신유박해 순교자 25위와 181.. 더보기
<국내성지008> 천주교인 전용 단두대, 절두산순교성지 180301 절두산(切頭山)은 예로부터 가을두(加乙頭), 잠두봉(蠶頭峰), 용두봉(龍頭峰) 등으로 불리어 왔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을 통과해 한양 근교까지 침범해 오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로 더럽혀진 한강을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겠다며 이곳에서 수많은 교인들의 목을 잘라 죽이게 되는데 (병인박해) 그때부터 이곳의 지명을 절두산(切頭山)이라 부르게 됬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66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서 절두산에 기념관을 건축했는데 기념관에는 성당을 비롯하여 27위 순교 성인과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성인 유해실, 그리고 박물관이 있다. 특히 박물관에는 교회의 귀중한 사료들과, 순교자들의 유품, 형구 등 3,500여 점 이상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 그 수나 규모 면에서 한국 천주교회를.. 더보기
<국내성지007> 사제들의 순교터, 새남터순교성지 180301 새남터 순교성지는 한국 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열네 분 가운데 열 한 분이 순교한 곳으로 이 가운데 여덟 분과 교회 지도자급 평신도 세 분이 성인 반열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성지 이다. 이 곳에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부터이다. 주 신부가 입국한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주 신부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생기자 주 신부는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가, 7년 뒤인 1846년 병오박해에는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기해일기'를 작성한 현석문 가롤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