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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성지순례

<국내성지149> 순교자 라 파트리치오 신부 순교 터 200813 라 파트리치오(Patrick Reilly) 신부는 1940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고 1947년 입국, 1949년 묵호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신자들이 배를 마련하여 피난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라 신부는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혼자 도망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는 공산군이 쳐들어오자 당시 전교 회장의 집 뒷방으로 피신하여 몰래 미사를 봉헌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던 중 라 신부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매질을 당하며 끌려갔다. 그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묵호에서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공산군에 의해 밤재굴에서 총살당하였다. 라 신부의 유해는 1951년 10월 11일 죽림동 성당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이후 묵호 성당 신.. 더보기
<국내성지148> 묵호 성당 (순교자 라 파트리치오 신부) 200813 1940년 강릉 임당동 본당의 관할 공소로 설정되어 시작된 묵호 성당은 해방 뒤에 묵호 해군 사령부의 군종 신부가 부임하여 사목 하였다. 이곳은 1948년에 본당으로 승격되었지만 아직 성전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대 주임인 한 프란치스코 신부는 묵호항 부근의 일본식 가옥에 임시 사제관을 마련하고 미사를 집전하면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 4월 라 파트리치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한국 전쟁 중 공산군이 성당을 점령하자 당시 전교 회장의 집에 잠시 피신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강릉으로 이송 도중 밤재 굴에서 순교하였다. 이후 전쟁으로 본당에 사제가 파견되지 못하였다. 교우들은 양들을 두고 피신할 수 없었던 착한 목자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본당 마당에 순교비를 세웠으며 시복시성을 위해 열심히 기.. 더보기
<국내성지147> 행정 공소(옹기 마을 신앙촌) 200813 행정 공소는 본디 외교인촌이었으나, 1924년경에 옹기점 마을 회장이었던 김세중 라파엘이 일가를 데리고 양평에서 이주하여 옹기점 교우 마을(점촌)을 이루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아들과 손자까지 3대에 걸쳐 공소 회장을 맡으며 전교에 힘썼고, 한때는 마을의 50세대 전체가 옹기를 굽는 교우들이었다. 박해 시대 이래 교우들은 오지그릇이나 숯을 구우며 숨어 살았는데, 행정 공소는 그러한 우리 교회사를 상징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행정 공소는 금광리, 도문, 학야, 산두 공소와 더불어 영동 지역의 주요 공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행정 공소는 처음에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1958년 신자들이 힘을 모아 옹기를 굽는 가마에서 흙벽돌을 구워 공소 건물을 지었으며, 신자들의 열심한 전교 활동으로 삼산 공소(1958년)와 .. 더보기
<국내성지146> 임당동 성당 (순교자 심능석 스테파노, 이유일 안토니오) 200814 1866년 박해 이후로 신자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져, 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영동 지방까지 피신하여 교우촌을 이루고 토기 업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었다. 1868년 강릉 굴아위에 살던 심능석 스테파노와 이유일 안토니오가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끌려가 순교하였다. 심 스테파노는 자신을 찾는 경포에게 떳떳이 천주교인임을 밝히고 붙잡혔다. 심 스테파노와 이 안토니오는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 시복을 추진하고 있으며 춘천교구 교우들은 매 미사 때마다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 임당동 성당은 1921년 7월 양양 본당 보좌 신부였던 이철연 프란치스코 신부가 금광리 교우촌에 머물면서 사 목 한 데서 시작되어, 1923년 주문진, 1931년 강릉읍으로 본당을 옮겼다가 1934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더보기
<아름다운성당> 천호성지 부활성당 190622 천호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호(天呼) 성지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의 터전이다. 이곳은 1866년 12월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성인과, 같은 해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 열명이 묻혀있다. 현대적 감각의 건축미를 지닌 성당 내외부의 독특한 모습이 아름답다. 순교자 묘지 십자가의 길 피정의 집 더보기
<아름다운성당> 해미순교성지 성당 190430 해미 순교 성지는 이름이 기록된 순교자는 132명이지만 실제로는 1천여 명 이상이 순교한 곳이다. 정사 박해(1797년) 당시 해미현은 무관 영장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여 조정의 시책과는 무관하게 처형을 하면서도 중앙에 보고를 하지 않았고 기록도 남기지 않아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다. 성당의 모습도 옛날의 고딕 건축 양식과는 다른 현대적 건축 양식이다. 성당과 이어진 전망대 모습이다. 성당 밖에서 보는 성당 모습이다. 순교자들이 죽음의 행렬 중에 바쳤던 "예수마리아" 기도소리가 구경을 하던 외인들에게는 "여수 머리"로 들렸기에 저들은 이곳을 "여숫골"이라 하여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순교 성지 기념관의 외부와 내부 조각상들이다. 순교자리개돌 돌다리 위에 신자들을 눕히고 자리개질로.. 더보기
<아름다운성당> 남양 성모성지 대성당 200504 올 해는 코로나 19로 인해 성지순례도 중단했고, 주일 미사도 성당이 아니라 집에서 평화방송을 보면서 성체 없이 봉헌해야 했다.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세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듯하여 방역 당국도 사회적 거리두기 강도를 조금 낮췄다. 마침 5월이 성모성월이기도 하고, 남양 성모 성지의 대성당 신축 공사가 어느정도 진척 됐는지도 볼 겸, 올해는 포기해버린 철쭉꽃 구경도 할 겸, 겸사겸사해서 사람이 가장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월요일에 아내와 함께 남양 성모 성지로 갔다. 오전 11시 경에 도착하니 주차장에는 성지 휴무일인 월요일임에도 주차해 있는 차량이 꽤 많다. 여기는 화성시가 화성 8경으로 지정하여 홍보하는 곳이어서 신자가 아니어도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으며, 신록과 철쭉을 보러 온 사람들이 많다. .. 더보기
<국내성지145> 포천 순교성지(복자 홍인 레오 순교터) 200226 홍인 레오의 집안은 본래 한양의 이름 있는 집안이었다. 그의 부친이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 서소문에서 순교한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바로 그의 부친이다. 홍인 부자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것은 1781년 그의 부친이 양근에 살고 있던 고종 사촌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홍인은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홍인은 세속의 꿈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교리를 전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면서 효성을 다하는 길은 부친을 신앙으로 이끌어들이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부친을 설득하여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부친과 함께 찾아가 세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