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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성지

<국내성지115> 중림동 약현 성당 190908 중림동 약현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이후 100년의 역사를 대변하는 성당이며, 한국 천주교회를 태동시키고 이끌어온 순교 성인들 가운데 44명의 성인이 탄생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주변에 세워진 성지 순례 기념 성당이다. 성당 근처에 이승훈 베드로의 집이 있었고, 신유.기해.병인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과 가까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므로 이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1991년 김수환 추기경이 주례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축복식에서 약현 성당이 서소문 성지 순례 기념 성당임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를 통해 무관심에 방치되어 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는 새로운 관심과 기대 속에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중림동 약현 성당은 순교자들을 더욱 현양할 수 있는.. 더보기
<국내성지114>여산 하늘의 문 성당 (백지사터, 숲정이, 배다리) 190622 여산 성지는 무진박해(1868년) 순교지이다.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3명에 이르며 그 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 (김성첨 토마스, 김성화 야고보, 성 손선지의 딸 손막달레나 등), 이들은 여산, 고산, 금산, 진산, 등지에서 잡혀왔는데, 고산 넓은바위에서 잡혀온 이들이 많았고, 여산옥, 숲정이, 뒷말, 배다리, 장터, 기금터, 백지사터 등지에서 순교하였다. 여산 성지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순교자들이 하늘 나라로 들어간 '하늘의 문'이다. 순교자들은 박해의 모진 고난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신앙을 고백하였다. 특별히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모습을 순교자들이 직접 증언한 '성령의 순교지'라 할 수 있는데, 참수형을 당한 숲정이는 '불의 순교.. 더보기
<국내성지113> 한정흠 순교사적지, 김제순교성지 190622 한정흠(스타니슬라오)은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출신으로 유항검 집에서 자녀들의 스승으로 생활하며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난 뒤에는 오직 교회 일에만 전념하였다. 신유박해 때 유항검과 함께 체포되어 전라 감영에서 혹독한 형벌과 심문을 받았다. 그 뒤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지만,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8월 11일 형조에서는 해읍정법에 따라 한정흠을 김제로 보내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사형 판결문에는, "유항검의 집에 다년간 머물면서 사학에 깊이 빠졌고, 그 가르침을 독실히 믿었다. 예수를 삼가 받들었고, 주문모 신부를 스승으로 섬겼다. 첨례를 지냈고, 요사스런 상을 받들었으며, 더러운 물건을 지니고 있었다. 사당을 허물고 .. 더보기
<국내성지112> 순교사적지, 전주 옥 터 190622 조선 시대 전주는 전라도 중심지여서 신자들이 각지에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혀 심문, 고문을 당하고 순교하였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동정 부부인 유중철과 그의 동생 유문석이 교살되었고, 이순이 루갈다는 옥중 편지를 작성하였다. 정해박해(1827년) 때는 24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 때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도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기해박해(1839년) 때는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홍봉주 토마스의 아내 심조이 바르바라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 때 생긴 상처로 옥중에서 순교하였으며, 순교 역사상 가장 어린 이봉금 아나스타시아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이봉금의 나이는 만으로 12세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박해 시기에 옥은 고통스러운 곳이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더보기
<국내성지111> 나의 성지순례 종착지, 어농성지 190516 천주교 어농 청소년 성지는 1987년 9월 15일 고 김남수 안젤로 주교가 축복하였고 2002년 8월 최덕기 바오로 주교가 "을묘 신유 박해 때 순교하신 선조들을 기리고 현양하기 위한 기념 성지"로 선포하였다. 어농 청소년 성지에서는 1795년의 을묘박해 때에 순교한 최초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 복자를 현양하고,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 야고보, 사촌 여동생 윤점혜 아가타 동정 순교자, 윤운혜 루치아 . 정광수 바르나바 부부 순교자, 이들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도왔던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와 경기도 동부 출신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조용삼 베드로,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심아기 바르바라, 정.. 더보기
<국내성지110> 성가정 성지, 단내성지 190516 단내 성가정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1804~1866년)와 정 베드로 순교자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단천리는 한국에 교회가 세워지던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와 연관이 있었던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한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인 단내마을(단천리)과 동산 밑 마을(동산리)은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 활동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천(동산 밑 마을)이 고향인 이문우 성인, 조증이 성녀와 조증이 성녀의 남편으로 이천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신 남이관 성인을 비롯하여 이호영 성인, 이 아가타 성녀 등 다섯 분의 순교 성인을 기념하는 성지이기도 하다. 단내 성지에서 기념하는 순교자들은 대부분이 가족 순교자들이고, 또한 남달리 극진한 가족 사랑을 보여 준.. 더보기
<국내성지109> 최양업신부 중심사목지, 배티성지 190407 배티 성지는 한국 천주교 박해기에 형성된 배티 교우촌에서 시작되었다. 이 교우촌은 1837년 5월 성 모방 베드로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이를 전후하여 배티 골짜기 이곳저곳에는 비밀 신앙 공동체들이 형성되었다. 박해 소설 [은화]의 무대가 된 삼박골을 비롯하여 동골, 절골, 정삼이골, 지장골, 발래기 등이다. 1850년에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1857년 주교 수품)가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설립하고, 배티 교우촌에 신학교 건물로 사용할 집 한 채를 마련하였다. 그 뒤를 이어 1853년 여름부터 신학교 지도를 맡게 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배티 교우촌을 본당으로 삼고 전국 다섯 개 도를 순방하였다. 현재 배티 성지에는 2014년에 문을 연 '최양업 신부 박물관'이 있다. 배티 인.. 더보기
<국내성지108> 순교복자 인언민 사적지, 삽교 배나드리 190430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동남쪽 삽교천 가에 위치한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불렸다. 바다로 통하는 삽교천에 밀물 때면 사방에 물이 차 섬이 되어 배를 타고 다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16년 봄 경상도에서 발생한 박해의 영향이 배나드리에도 미쳤다. 내포 지방 출신 신자들이 경상도에 피신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1817년 10월 배나드리에서 20~30명 가량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중 민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순교하였다. 배나드리 인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순교자는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이다. 그는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례(삽교읍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