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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성지

<국내성지099> 루르드 성모님을 모신곳, 성모당 190405 성모당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안에 위치한, 대구대교구의 제1주보이신 루르드 성모님을 모신 곳이다. 성모 동굴과 크기와 바위 모양까지 똑같고, 둘러싼 벽돌당은 레오 13세 교황이 로마에 지은 루르드 동굴의 벽돌당과 같다. 1911년 대구대교구의 초대 교구장이 된 드망즈 주교가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이 이루어진다면 대구가 가장 잘 바라다보이는 곳에 성모 동굴을 짓기로 허원했다. 그리하여 드망즈 주교가 직접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드린 서약에 의해) 1918"이라는 글을 새긴 성모당이 완공되어 1918년 10월 13일 축복식을 가졌다. 1973년 5월부터는 성모의 밤 행사를 개최하면서 유명해졌고, 교구의 제2주보성인이신 이윤일.. 더보기
<국내성지098> 대구 천주교 요람지, 신나무골 190406 신자들이 나무 아래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신나무골'은 대구에서 서북 방향으로 20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신나무골 성지에는 경신박해 때 순교했다고 알려진 이선이 엘리사벳 묘역이 있고, 대구 지역 첫 본당터와 엘리사벳의 집(예수 성심 수녀회 은퇴 수녀들의 거처)이 있다. 원래 이선이의 유해는 한티에서 순교한 뒤 선산에 모셨다가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이곳 신나무골에 이장한 것이다. 본당터 안에는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흉상, 사제관과 과거 선교사들의 사진과 유물, 공소가 있다. 이 마을에 처음 신자들이 산것은 1815년 을해박해 때로 추측된다. 교우촌이 형성된 이후 샤스탕 신부가 방문한 것으로 추측되며, 다블뤼 주교와 최양업 신부와 리델 신부가 사목 활동을 했다.. 더보기
<국내성지097>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 한티순교성지 190404 한티 순교성지는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이다.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를 전후하여 박해를 피한 교우들이 팔공산 중턱으로 숨어들어 1850년 말경에 한티는 큰 교우촌을 이루게 된다. 병인박해(1866년)가 진행 중이던 1868년 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많은 교우들을 그 자리에서 처형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박해 소식을 듣고 인근에 살던 교우들이 한티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 가고 있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하여 옮길 수가 없었기에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티 순교자들의 묘는 모두 37기로 박해 당시의 교우촌과 그 주위에 넓게 흩어져 있다. 그중에는 당시 공소 회.. 더보기
<국내성지096> 정해박해 진원지, 옥터(곡성성당) 190319 수려한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곡성 성당은 1827년 발생한 정해박해의 진원지이자 교우들이 붙잡혀 와 갇힌 옥터가 있는 곳이다. 1815년경 을해박해를 피해 남으로 남으로 숨어들어 온 신자들이 곡성 지방 덕실마을(승법리)과 미륵골에 정착하면서 이들은 생계유지와 신앙생활을 위해 가마를 열고 옹기를 구워 팔며 생활하게 된다. 1827년 2월 어느 날 가마를 여는 축하연 자리에서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되어 관가에 천주교 신자를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 신자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고문하는 탄압의 손길이 전국으로 확산되니 이 사건이 바로 정해박해의 시발점이 된다. 정해박해는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해서 전라도 지역에서는 교우들이 집단생활을 전폐하고 심산유곡으로 피신해 .. 더보기
<국내성지095> 한국 두번째 성당, 첫 한옥성당, 되재성당 190322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고산 지역에 성당이 세워지는데 이곳이 바로 1895년에 완공된 되재 성당이다. 고산 본당의 전신인 되재 성당은 1893년에 비에모 신부가 차돌배기(현 백석,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거처를 정하고 전교를 시작할 때로부터 시작된다. 비에모 신부가 이곳에 본당을 정한 이유는 박해의 여파가 남아 신자들이 주로 산간 지대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 고산 지역에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 박해를 피해 각처에서 몰려든 신자들이 많았으며 병인박해 때에는 이 일대에 교우촌이 무려 56곳이나 됐다고 전해진다. 실재로 되재 성당이 설립된 뒤 성당 주변에는 큰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나, 그 후 신자들의 이주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되재 성당은 단층 3칸 * 8칸짜리 한.. 더보기
<국내성지094>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 190322 여산 성지는 무진박해(1868년) 때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당한 순교성지이다. 순교자들은 당시 여산군의 속읍지였던 고산, 금산, 진산 등에 숨어 살다가 잡혀 온 이들이다. 여산은 당시 사법권을 지닌 부사가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이 붙잡혀 오면 여산에서 처형되었다.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5명에 이르며 그 외에도 이름을 알지 못한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 숲정이, 뒷말, 배다리, 장터, 기금터, 감옥터, 백지사터 (여산 칠순교지) 등 여산면 전체가 순교성지라 할 수 있다. 이곳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방법으로 신자들을 처형하였는데, 특히 참수형, 수장형, 백지사형 등은 유명하다. 순교자들은 박해의 모진 고난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목숨을 바쳐 신.. 더보기
<국내성지093>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터, 천호 190322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천호(天呼) 성지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의 터전이다. 천호 성지에는 박해 시대에 다리실 교우촌(천호 공소)을 포함한 총 7개의 공소가 있었는데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각 지역은 산세가 험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 말할 정도로 첩첩산중이었다. 이런 곳으로 숨어들어 와 땅을 일구고 신앙생활을 하던 교우들의 피와 땀이 지금의 한국 천주교를 일구었을 것이다. 천호는 호남이 자랑하는 천주교의 대표적 사적지로 1866년 12월에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네 분인 이명서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한재권 요셉 성인과, 같은 해 8월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 .. 더보기
<국내성지092> 6성인12복자 순교지, 전주 숲정이 190320 숲정이 성지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정이' 또는 '숲머리'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유항검의 가족이 처음 참수되면서부터 순교자의 피가 마르지 않은 곳이다. 숲정이는 기해박해, 병인박해 때에도 수많은 유혈이 있었는데 순교자 중에서 신원이 밝혀진 사람은 1839년에 참수된 복자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이일언 욥, 정태봉 바오로, 김대권 베드로 등 5명이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리에 살던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손선지 베드로, 정원지 베드로 등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67년에는 김사집 필립보를 비롯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치명하였다. 1984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 71호로 지정된 숲정이는 여러 현세적인 이유와 도시 개발에 밀려 본디 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