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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성지

<국내성지107> 6곳의 순교터, 홍주 순교성지 190322 홍주 성지는 충청도의 첫 순교터이며,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성지이다. 홍주는 1784년 한국 천주교 설립 초기부터 충청도의 첫 신자인 이존창의 영향으로 복음이 활발히 전파된 곳이다. 천주교 신자가 제일 많았던 홍주 지역(내포 지역)은 행정, 군사의 요충지인 홍주목과 진영이 있던 관계로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기록상으로만 초기 박해(신해~정사)동안 8명, 이어 중기 박해(신유~기해)동안 4명, 병인박해에 200명이나 된다(총212명) 박해 기간(1791~1869년) 동안 무명 순교자까지 1,000명이 넘는 순교자를 탄생시킨 거룩한 성지이다. 특히 원시장 베드로는 신해박해 때 홍주 옥에서 세례를 받고 추운 날 동사형으로 순교하여 충청도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더보기
<국내성지106>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 190322 공주에 있는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조선 천주교회 박해 역사 100년 동안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장소로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가 337위에 이르고, 무명 순교자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공주는 조선 시대에 충청 감영이 있던 중심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청도 전역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배교하지 않으면 공주로 압송되어 최종 문초 고문 판결 처형되었고, 다른 지역의 신자들도 공주로 보내 최종 형을 집행하였다. 황새바위 순교성지에서 기려야 할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향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있고, 신유박해 때 참수 치명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순교자가 있다. 또한 124위 복자 이국승 바오로, 김원중 스테파노, 청양 정산에서 순교한 이도기 바오로가 있다. 황새바위 .. 더보기
<국내성지105> 다산 정약용 유배지, 다산초당 190321 강진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무려 18년간 유배됐던 곳이다.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의 형제는 약현, 약전, 약종이 있는데 이들 4형제는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첫째 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며,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고 또한 이들 4형제의 누이가 이승훈의 부인이다. 순교한 셋째 약종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데 이어 복자가 되었으며, 이미 성인이 된 정하상과 정정혜가 그 자녀다. 다산은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 더보기
<국내성지104> 나주 순교자 기념 성당 190321 나주 성당 내에 위치한 순교자 기념 성당은 이춘화 베드로와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 등 네 분의 위대한 믿음과 삶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무덤 형태의 경당이다. 공주 출신 이춘화는 1839년 기해박해 때 나주에서 순교했고, 전북 용담 출신 강영원과 경상도 출신 유치성, 전남 장성 출신 유문보는, 1866년 병인년에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령을 내림으로 시작된 병인박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1871년에 나주 진영으로 잡혀 왔다. 유문보는 모진 고문 때문에 1872년 옥사로 순교하고 강영원과 유치성은 1872년 나주 진영 무학당(현 나주초등학교) 앞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였는데 백지사형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 더보기
<국내성지103> 가톨릭 목포성지, 산정동성당 190321 전라남도 지역의 본격적인 복음 전파는 병인박해를 피해 온 다른 지역의 교우들이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가톨릭 목포 성지는 1897년 5월 8일 설립된 광주대교구 첫 번째 본당(성십자가 성당, 현 산정동 성당)으로,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광주 4대 교구장이었던 패트릭 브렌난 몬시뇰과 토마스 쿠삭 주임 신부, 존 오브라이언 보좌 신부가 북한 인민군에 피랍되어 북한으로 이송 중 대전에서 처형된 순교 사제의 사목지이다. 이 세 분은 근 . 현대 신앙의 증인으로 시복 시성을 준비하고 있다. 1953년 5월 31일 이곳에서 2 개의 쁘레시디움('치명자의 모후, 평화의 모후')이 최초로 회합을 가지면서, 한국 레지오 마리애가 시작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 더보기
<국내성지102> 순교복자 3인 기념성당, 진목정 190405 경주시 산내면에 위치한 진목정은 인근 탑골과 상선필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피난 와서 살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후 1837년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부들이, 1850년경부터는 최양업 신부에 이어 다블뤼 주교와 리델 신부도 상선필과 이곳을 순회 선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병인박해 때는 울산 살티에 모여 살던 허인백(야고보),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의 가족이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산내면 소태동 범굴로 피신해 살았으나 체포되어 약 세 달간 모진 심문과 고문을 받은 뒤, 1868년 9월 14일(음 7월 28일) 동천 강가 울산 장대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유해는 허인백의 아내 박조예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울산 장대 옆 동천 강가 외진 곳에 묻어 두었다가 진목정.. 더보기
<국내성지101> 병인순교100주년 기념성당, 복자성당 190405 복자 성당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의 묘소가 있다. 세 분 순교자는 본디 박해를 피하여 언양 죽령리 공소 지역에 살다가, 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여 경주 산내면 단석산 범굴로 숨어 살았으나 포졸들에게 붙잡혀 온갖 문초와 극심한 옥고를 치르고 울산 장대벌에서 1868년 순교하였다. 경주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에 매장되었는데, 1932년 대구 감천리 교회 묘지로 이장했던 것을 복자 성당 건립 정신에 따라서 1973년 10월 19일에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세 분 순교자는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데에 이어 절차에 따라 시복되었다. 묘소 뒤쪽에 있는 성당은 병인 순교 100주년 성당으로서 시복 시성 운동의 일환으로 교구민의 헌금으로 1970년에 봉헌된 성당이다. 성당.. 더보기
<국내성지100> 영남 제일의 순교터, 관덕정순교성지 190405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이신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이며, 많은 신앙 선조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참수 치명당한 거룩한 곳으로, 공식 명칭은 '천주교 대구 관덕정 순교성지'이다. 관덕정은 조선 시대 무과 시험 제도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으로 조선 영조 25년에 세운 건물로 옛 이름은 관덕당이었다. 관덕당은 누각과 넓은 마당이 있어 군사 조련이나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장으로 쓰이던 곳이었는데, 그런 이유로 이곳에서 사형 집행도 이루어졌다. 관덕당에서는 1815년 을해박해 때 7명이 순교했으며, 1827년 정해박해 때 3명, 1866년 병인박해 때 이윤일 요한 성인을 비롯하여 7명이 순교했다.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는 날뫼, 묵리 등을 거쳐 1976년 미리내 무명 순교자.. 더보기